오늘은 장인이나 아내에게 특별하다. 장모님이 돌아가신지 10주기 되는 날이다. 그간 애들이 콩나물처럼 컸다. 장모님이 못 본 애들도 절을 했다. 장인은 미리 준비한 추모사를 읽었다. 음성은 간간이 흩어졌다. 그의 소리는 우리에 스스로 갇힌 절규다. 그는 왜 그리 빨리 가셨느냐고 10년의 시공을 넘어 상 넘어 입을 닫은 그녀에게 말했다.
제상 왼편, 30대 말의 대학교수인 아들은 검정 양복을 입었다. 뒤에 서 있던 그의 큰 누나와 막내 누나는 소리가 없다. 70대 후반에 접어든 사내의 음성은 60대 초반의 아내 영정 앞에 무릎을 꿇고 존칭을 했다. 삶과 죽음의 양면은 달랐다.
아파트에서 내려다본 일산 식사동은 고요했다. 여름내 벼는 파랬다. 가을의 황금빛 불볕은 식었다. 이제 모든 게 하얗다. 개울 따라 뱀처럼 늘어진 도로 건너에 산은 앙상하다. 나뭇가지는 눈 속에 바래진 회백 빛이다. 그 왼편으로 먼발치에 암벽의 산이 우뚝하다. 서울을 호위하는 근육질 어깨 같다. 그 너머에서 나나 장인은 살아간다. 이날 낮에 내린 눈은 고요했다. 밤이었다면 거룩한 우주의 행사였을 거다.
초로의 사내도 영정 속 시선과 정면으로 보며 짧은 인연을 떠올렸다. 긴 인연, 긴 인고의 여생을 견디던 칠십 중반 장인의 떨리는 음성을 듣던 허리에 꼭 끼는 검은색 양복이 간간이 좌우로 미동했다. 눈가에 얕은 물이 고였다. 어둠이 내린 창밖을 내다보았다. 오른쪽 공원 뒤로 불빛이 밝았다. 낮에 애들이 플라스틱 눈썰매를 타던 공원은 불빛만 켜졌다.
밤에 상경했다. 창밖은 영하 6도다. 자유로도 추워지면 교통도 없나 보다. 서울 용산에 금방 도착했다. 중앙선에는 어두운 색상의 외투를 껴입은 사람들이 열차를 기다렸다. 장인은 벌써 6호선을 타고 갔다. 이어폰을 끼고 월스트리트 저널 비디오에 쏟아져 나오는 잘 들리지도 않는 소리를 귓속에 쏟아 부었다.
오늘 일이 머리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흩어지지 않는 바람처럼 인연따라 인생은 모이고 흩어진다. 살과 뼈와 피가 모여 인생은 만들어진다. 더 큰 사연이 생기면 인연도 커지고, 더 큰 사건이 생기면 인연도 흩어진다. 인생은 흩어지지 않는 바람이다. 바람을 심으면 회오리를 거둔다는 영어 속담이 있다.
회오리 속에서 '흩어짐(散)'이라는 문자(文字)가 내겐 너무 거대했다. 여름내 모기(蚊)가 살이 떨리게 공포스러웠다. 그 틈을 형체가 없는 산(散)이라는 글자가 파고들었나 보다. 가족은 추억이다. 이 파편들이 시공 속에서 가슴 속을 날아다닌다.
세월 속에서 누가 이 회오리를 벗어 날 수 있겠나? 해가 갈수록 그분은 살아생전 자신의 보폭을 못 따라 뛰어다니던 그 아내가 하냥 그립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