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니어 에세이] 젊으면 열리고 늙으면 닫히나

지난 해였던가. 우리나라 선수들이 세계여자컬링선수권대회에서 사상 첫 4강에 진출했던 경사가 있었다. 전용 경기장 하나 없어 선수끼리 돈을 걷어 경기장을 빌렸고, 빙판 전용 신발도 없어 운동화에 아크릴을 붙이고 연습했다는 기사는 감동적이었따. 볼드체의 중간제목 ‘젊은 피 수혈로 슬럼프 탈출’도 한 몫 거들었다. 그런데 기사에 달렸던 댓글 또한 눈길을 잡아끌면서 무심코 이런 말을 해서는 안 되겠구나 싶어 스크랩해 두었다.

“기자 양반, 무어 ‘젊은 피를 수혈해서’ 이 말은 많은 생각을 갖게 하는 이야기다. 마치 젊은 사람들로 전부 늙은 피 소유자들을 다 바꾸어야 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세대 간의 갈등을 조장하는 반사회적인 표현이다. 낡은 피를 가진 사람들의 기분을 생각해 보았는가?”

이 댓글이 문득 다시금 떠오른 이유는 나 또한 친구의 일로 비슷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봉사나 하시지요

수십 년간 현직에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던 한 친구가 얼마 전 겪은 일이었다. 퇴직 후 월급보다는 지역사회를 위해 기여할 만한 일을 하고자 하는 친구였다. 그래서 이렇게 저렇게 관여하는 자원 봉사적인 일들에 대해 이따금 이야기했다. 그런데 좀 더 책임감 있게, 또 소신 있게 일하려면 결국 직업적인 자리가 필요할 것 같다고 했다. 마침 거주 시에서 자신에게 딱 맞는 경력자를 뽑는다기에 지원했다고 한다. 번거로움은 질색인 그녀가 경력증명서를 비롯해 전 학년 성적증명서 등등 갖가지 서류들도 완벽하게 제출했다고 해서 놀랐다. 분명 나이 제한은 없었지만 직접 지원서를 접수하러 가서 담당자에게 재차 확인도 했다고 한다.

“제가 좀 나이가 있는데….” 넌지시 말을 꺼내려하자 눈치 빠른 담당자는 ‘지원에 문제없다’고 하더란다. 이력서를 흘깃 보더니 ‘경력이 대단하시다’고 덧붙이기까지 했단다. 1차 서류전형 합격에 이어 2차 면접전형. 10여 명의 면접 대기자 중에는 20대 후반에서부터 친구와 같은 세대로 보이는 남자도 있기에 정말 ‘열린 채용’이구나 반가웠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상은 ‘닫힌 채용’이었음을 면접현장에서부터 절감했다며 친구는 분노했다.

“면접관 4명이 이구동성으로 ‘지원하실 분이 아니라 우리가 꼭 모셔 와야 할 분’이라는 거야. 이럴수록 더 겸손해져야겠다 싶대. 그래서 ‘수십 년 살아왔고, 딸과 아들도 계속 살았으면 하는 고향 같은 지역의 일이기에 오직 감사하며 봉사하고자 하는 마음’이라고 했어. 그러자 가운데 여자 면접관이 ‘이런 지원보다는 봉사 쪽이 어떻겠냐’는 거야. ‘봉사도 하고 있지만, 소신과 책임으로 일하려면 직책이 필요하다 느꼈고, 무엇보다 이 일은 제가 아주 잘할 수 있는 일’이라고 말했지. 다른 면접관들은 이력서를 내려다보며 다들 고개를 끄떡거리더라고.” 누가 객관적으로 보더라도 그 자리에 능력이 넘치는 친구였다.

50대 여성의 구직 급증
 
“그런데 그 여자 면접관은 ‘대기자들을 봤으니 아시겠지만 요즘 젊은이들의 취업난이 심하다’, ‘능력은 뛰어나시지만, 젊은이들에게 양보하면 안되겠냐’라고 계속 몰아가는 거야. 그러면서 ‘나이가 있는데 건강에는 문제가 없냐, 어떻게 건강관리를 하냐’며 건강문제로까지 물고 늘어지더라구. ‘여지껏 결근이란 걸 모르고 일해 왔고, 출산할 때 외는 병원에 가본 적이 없다’고 했지. 그렇게 짧은 면접이 끝났다니까. 경력자를 뽑는 면접인 만큼 일을 할 수 있는 역량이라든가, 어떻게 일할지에 대한 타진이 우선돼야 하는 거 아냐? 그리고 나이 들었다고 해서 건강부터 문제 삼아도 되는 거니?”친구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차라리 지원 시 나이제한을 둘 것이지, 신입도 아닌 경력 모집, 그것도 엄연한 공채시험에서 나이를 들어 양보만을 대놓고 강조하다니! 능력을 판단한 후 면접관들끼리 막후에서 논의해도 늦지 않는 거잖아. 사람을 앞에 놓고 나이로 우습게 만드는, 뭐 그런 면접이 다 있다니? 그 기관조차 우스워지는, 완전 아마추어 수준인 거지. 잘 걸렸어. 그냥 지나가지 않을 거야. 나이 차별로 따질 거야.”나 역시 공분을 느꼈다. 친구의 일이 아닌, 바로 내 일, 50대 여성 공동의 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근래 들어 50대 여성의 구직이 급증하면서 그 고용률이 자녀뻘인 20대보다 높아졌다고 한다. 기껏 가르쳐 놓은 딸과 아들은 취업난인데다, 향후 결혼도 대비해 줘야 하건만 남편은 퇴직에 이르고, 물가고는 심하고….
 
요즘 50대 여성이야말로 돈이 많이 필요할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하지만 일자리라야 식당이나 청소 같은 허드렛일이 대부분인 실정이다. 좀 나은 데라면 대형 마트 정도일까. 친구는 그나마 오랜 전문경력에다 능력이 짱짱하니 1차 서류합격이라도 된 것일 게다. 그러면 뭐하나 최종 발표도 전에 이미 불합격이 되고만 셈인데.
 
나이 차별의 현실
 
언젠가 사회학자 김호기 교수가 쓴 글을 본 적이 있다. 김 교수는 일자리, 건강, 여가 등 50대 여성들이 대면한 문제들에 대해 정부와 사회기관들이 큰 관심을 갖고 구체적인 정책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했다. 개인의 주체적인 자각과 대응도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은 중심에서 벗어나 주변으로, 정상에서 내려와 하산 길로 들어서는 게 아니기에 쉰이 됐다 해서 삶에서 물러날 필요는 없다고 했다. 경제적 보수가 적거나 또는 없다고 해서 마다할 게 아니라 새로운 일을 찾아보라고 했다. 그런데 마다하려 하지 않아도 사방에서 마다함을 당하는 현실이라니! 친구를 달랬다.
 
“면접에서 나이 차별을 드러낸 건 어찌 보면 솔직한 거야. 겉으로는 열린 채용인 척 대내외적으로 생색도 퍽이나 내면서 막상 합격자를 보면 그렇지 않은 경우가 태반 아니니. 나이, 학벌, 스펙, 게다가 외모에, 부모 배경까지 다 따진다는 거지. 우리 아이들도 그래서 힘들어하는 거고. 솔직했다 치고 그냥 지나가자.”
 
“아니.”

친구는 단호했다.

“나이 드는 게 무슨 잘못이야? 열린 채용이라고 해놓고 젊으면 열리고 늙으면 닫힌다니. 공공기관부터 알아야 해. 아무리 ‘을’의 입장이라도 지적할 말이 있는 것이고, ‘갑’일지라도 듣고 수정할 점이 있다는 걸. 그리고 그 여자, 외부에서 초빙된 면접관 같던데 자기도 조금 있으면 쉰이 될 나이더구먼. 어디 한번 입장 바뀌어보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