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한론의 뿌리, 가고시마를 답(踏)하다

2004년 12월 17일 일본 가고시마(鹿兒島)의 온천휴양지 이부스키(指宿)에서 열린 한일정상회담을 앞두고 국내에서는 회담 장소와 관련하여 논란이 일었다. 가고시마는 1873년 정한론(征韓論)을 내세워 조선과 일전을 벌여야 한다고 주장했던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의 고향으로 한일합병의 씨를 뿌린 곳이었다는 점 때문이었다.

당시 반기문 외교부 장관이 장소 변경을 거론했을 정도로 국내 여론이 좋지 않았지만, 회담은 예정대로 진행되었다. 그 후 노무현 대통령은 회담과 관련한 뒷얘기를 기자들에게 털어놓으면서 그 배경을 이렇게 설명했다.

"고이즈미 총리가 간접적으로 그 사실을 전해 듣고 ‘한국주장에 대해 일리가 있다'면서 우리가 원하는 곳으로 정하겠다고 했는데, 고이즈미 총리가 그렇게 나오니까 오히려 내가 작아지는 것 같고, 괜히 사소한 것 가지고 그러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내가 '마 그냥 가자. 욕 좀 먹으면 되지 그게 중요한 것이냐'고 했다"는 것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재임 중 정치 행태와 관련하여 숱한 논란을 야기하였지만, 이때의 일만은 노 대통령이 대국적인 관점에서 일을 잘 풀었다고 생각한다. 지금처럼 한일관계가 꽉 막힌 답답한 시점에서 보면 그때 노 대통령의 ‘욕 좀 먹을 각오하고 그냥 가자’고 하는 대범함이 돋보이는 건 사실이다.

일본은 아차 하면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칼의 문화’ 속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상대방의 도량과 관용을 중시하는 전통이 있고, 특히 회담 장소였던 가고시마는 이런 전통이 일본 어떤 지역보다 강한 곳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 전통의 정점에 한 인물이 있다. ‘사무라이 정신의 고향’이라는 강한 긍지를 가진 가고시마 사람들에게 영적인 스승으로 추앙받고 있는 인물, 그가 바로 ‘정한론’의 원조 사이고 다카모리다.

아베 총리의 마음의 행로를 따라서 야마구치를 돌아 구마모토를 거쳐 36명의 시니어 역사기행단이 세 번째로 찾은 곳은 ‘정한론’의 발상지 가고시마였다. 구마모토에서 국도를 따라 버스로 가고시마에 들어서서 가고시마공항을 막 지나칠 무렵, 차창 밖으로 어마어마한 크기의 동상이 눈에 들어왔다.

팔짱을 끼고 가고시마공항을 내려다보고 있는 거상(巨像)의 주인공은 사이고 다카모리였다. 가고시마는 그 전체가 사이고 다카모리에 헌정(獻呈)된 땅이라는 말이 실감 나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이 땅이 참 묘하다. 일본의 건국신화는 우리와 같은 천손강림(天孫降臨)의 신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옛날 천상의 신들이 아래 세상을 내려다보고 안개의 바다에 떠 있는 섬을 발견하고는 창을 거꾸로 꽂아서 표시하였는데, 그 산이 바로 기리시마연산(霧島連山)의 다카치호미네(高千穗峰 1,574m)였고 산 정상에는 이를 기리는 창(天の逆:아마노사카호코)이 세워져 있다.

그 후 태양의 신 아마테라스 오오미카미는 손자와 8명의 신을 지상에 내려보냈는데, 그들이 내려온 다카치호미네에서 일본이 시작되었다고 전해진다. 가고시마현 기리시마(霧島)시에는 이 신화를 바탕으로 아마테라스 오오미카미의 손자를 모시는 기리시마 신궁이 있다.

그런데 천손강림의 성지인 기리시마연산의 최고봉은 다카치호미네가 아니라 ‘가라쿠니다케’로 한자로 ‘한국악(韓國岳 1,700m)’이라고 한다. 사무라이의 나라에서 가장 높게 추앙받는 ‘무(武)’, 가장 높은 산을 뜻하는 ‘악(岳)’을 모두 ‘다케’라고 한다. 일본 전국시대 전설적인 명장 다케다 신겐(武田信玄)의 이름을 보면 알 수 있다.

‘가라쿠니다케’를 풀이하면 ‘가라(駕洛=韓國)구니(國)다케(岳)’라는 뜻이다. 가야시대부터 한반도와 교류가 있었던 큐슈에서는 가야가 곧 한국으로 쓰인다. 임진왜란 때 가고시마로 끌려갔던 조선 도공들이 이 산에 올라가면 맑은 날 멀리 고향이 보였다는 데서 유래한 지명이라고도 전한다. 천손강림의 성지에 ‘한국악’이라… 묘한 기분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이뿐이 아니다. 사이고 다카모리는 가고시마의 가지야정(加治屋町)에서 1827년 가난한 사무라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가지야 마을에서는 러일전쟁 당시 일본 육군의 총사령관 오야마 이와오(大山巖) 원수, 러일전쟁 승패의 결정적 분기점이 된 동해 해전에서 당시 세계 최강의 발트함대를 괴멸시킨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 제독 등 메이지 시대 주역들이 무더기로 태어났다.

사이고 다카모리의 친동생으로 메이지 신정부의 최장수 해군 대신을 지낸 사이고 쓰구미치(西鄕從道) 등 일본 해군의 기초를 닦은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 이 마을에서 자랐다. 사이고 다카모리와 함께 메이지유신을 이끌었고, 신정부의 초석을 다진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는 건너편 동네에서 태어났다.

사이고 다카모리의 집이 있는 가지야 마을과 오쿠보 도시미치가 자란 동네 사이로 흐르는 작은 내를 고쓰키강(갑돌천. 甲突川)이라고 하는데, 한자 그대로 읽으면 우리 전래 동화의 갑돌이와 갑순이가 그대로 생각난다. 그도 그럴 것이, 오쿠보 도시미치가 자란 동네 이름이 바로 ‘고라이정(高麗町)’이기 때문이다. 가지야정과 고라이정을 연결하는 다리는 ‘고라이교(高麗橋)’라고 한다.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기에 이곳으로 끌려 온 조선 도공의 후예들이 집단으로 거주했던 지역이 바로 이곳이었음을 지명으로도 알 수 있다. 구마모토에서 보았던 ‘우루산마치(蔚山町)’가 연상되는 곳이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조선 도공의 후예 14대 심수관(沈壽官)의 고향도 바로 이곳이다.

가고시마에는 또 한 명의 조선인이 일본 역사의 한 획을 그었다. 태평양전쟁 종전 당시 일본 외무대신으로 종전협상을 무난하게 이끌어 전후 부흥의 기초를 닦았고, A급 전범으로 옥사한 도고 시게노리(東鄕茂德)는 본래 이름이 박무덕(朴茂德)으로 천하가 다 아는 조선인의 후손이다. 그와 재혼한 독일인 부인은 조선총독부 청사를 설계한 독일 건축가 게오르그 데 랄란데였다.

우리가 아무리 부인하려고 해도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진실은, 우리가 저주해 마지않는 일본의 조선 침탈의 역사 이면에는 숨길 수 없는 우리 핏줄의 흔적이 어른거린다는 사실이다. 일본에 선진문화를 전수해 준 원류로서의 자부심만 내세우고, 그 후손들이 다름 아닌 조선 침탈의 일역을 담당했던 사실에는 눈을 감으면 오늘날 한일관계의 꼬인 실타래는 영원히 풀리지 않을 것이다. 가고시마를 찾은 것은, 사무라이 정신의 원류라고 하는 그곳에 녹여져 있는 우리의 흔적을 통해서 우리 스스로를 한번 되돌아보기 위함이었다.

고대 한일 교류사를 추적하던 연구팀이 고구려, 신라, 백제의 포구에서 무동력선을 각 10척씩 띄워 항로를 추적한 적이 있다. 당시에는 아무래도 해류와 바람에 의지해서 바다를 건넜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었다. 그 결과, 고구려, 신라에서 발진한 배는 모두 동해 건너편 시마네∼니이가타 해변에 도착했는데, 백제 금강 포구에서 발진한 배는 관문해협을 건너서 큐슈 남쪽 휴가(日向), 지금의 미야자키 현에 가장 많이 도착했다고 한다. 우연의 일치일까?

미야자키에 인접한 가고시마의 쿠시키노(串木野)는 남원에서 끌려 온 심수관의 조상 심당길(沈當吉)과 도고 시게노리의 조상 박평의(朴平意)가 도착했던 곳이다. 가고시마 앞바다의 활화산 사쿠라지마(櫻島) 사이의 만 이름은 긴고우만(錦江灣)이었다. 왜 하필 백제 땅에서 해류와 바람을 따라오면 저절로 도착하게 되는 동네에서 일본의 건국신화가 시작되었을까? 숱하게 남아 있는 우리 지명이 의미하는 바는 또 무엇일까?

1886년 가고시마를 방문했던 윤치호는 조선인 후손으로 1천 호의 큰 마을을 이루고 있는 이쥬인(伊集院)촌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이곳 사람들이 영명하기로 이름나 지역에서도 이쥬인 사족(士族)으로 불리며 자못 존대 받는다고 썼다.

그런데 바로 이 마을에서 태평양전쟁 말기 가미카제 특공대의 선봉에 섰던 아리마 마사후미(有馬正文. 소장으로 제독의 신분을 마다하고 스스로 특공 출격하여 전사하였으며 사후 중장으로 추서)라는 인물이 태어났다. 아리마는 전쟁 말기 장군들이 뒤로 꽁무니를 빼면서 부하들만 특공대로 앞세워 죽음으로 내몰 때, ‘나이 먹은 자들이 먼저 죽어야 한다’며 단신 출격했던 최고위 특공대였다.

육당 최남선 선생이 만주에서 일본인 학생들을 앞에 놓고 조선이 일본의 문화적 자양분을 제공했다는 요지의 강연을 했더니 일단의 학생들이 씩씩대며 숙소로 쳐들어왔다고 한다. 어디서 온 학생들이냐고 물으니 ‘일본 사무라이의 고향인 사쓰마 출신’이라고 으스대서 껄껄 웃으며 조선과 가고시마의 뿌리 깊은 인연을 들려주었더니 얼굴이 벌개져서 돌아갔다는 일화도 있다.

가고시마를 찾았던 것은 사이고 다카모리를 비롯한 메이지유신 주역들이 정한론을 빌미로 어떻게 조선 침탈의 야욕을 키우게 됐는지 추적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왜 하필 이곳이 사무라이 정신의 고향이 됐을까 하는 대목에서 조선인과 일본인의 경계를 두부 자르듯이 가를 수 없는 정신의 혼재를 느끼고 혼란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다시 사이고 다카모리에게로 돌아가 본다. 그에 관한 사적과 일화는 가고시마 관광안내서의 거의 절반을 차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넘치기 때문에 생략한다. 1873년 정한론을 주장하던 사이고 다카모리는 각의에서 자신의 주장이 뒤집어지자 바로 사직하고 가고시마로 낙향했다.

당시 사이고 다카모리는 신생 일본 육군의 유일한 육군 대장으로 그의 수족인 사쓰마 사무라이들이 요직을 독차지하고 있었다. 사이고 다카모리가 낙향하자 그의 수족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따라 내려갔다. 사쓰마 사무라이들은 뒤에 미련을 두는 것을 치욕으로 여겼다. 진퇴가 분명한 그런 모습에서 일본인들은 그들 정신의 원류를 찾는다.

4년 후, 사이고 다카모리는 ‘사무라이의 나라’ 건설을 내세우며 자신이 세운 유신 정부에 반기를 들고 반란을 일으킨다. 1877년의 세이난(西南)전쟁이다. 이 전쟁으로 일본은 유신 후 최대의 전란에 시달렸고 무려 2만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조선이 병자수호조약 체결로 강제 개국을 당한 지 불과 1년 만의 일이었고 이때 조선이 정신을 차리고 내실을 다지는데 힘썼다면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사이고 다카모리가 그렇게 무모한 반란을 일으킨 것은 사무라이 신분 철폐에 대한 사족들의 불평불만을 누군가는 대신 짊어지고 불 속으로 뛰어들어 잠재워야 했기 때문에 역사의 악역을 자임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가 묻힌 난슈(南洲)묘지에는 평소 그가 자주 했던 어록이 남아 있다.

“목숨도 필요 없고, 이름(명예)도 필요 없고, 관직도 돈도 필요 없는 사람은 다루기 힘든 법이다. 이런 다루기 힘든 자야말로 갖은 고난을 함께 하며 국가의 대업을 이룰 수 있다.”

세계 혁명 역사를 통틀어, 혁명의 주역이었으면서도 그 과실을 탐하지 않고 스스로 몰락의 길을 선택했던 거의 유일한 경우였다. 메이지유신과 일본제국의 발흥은 그 바탕 위에서 가능했다. 그 후의 역사가 옳고 그름을 떠나서, 한 국가가 일어서기 위해서 어떤 지도자가 필요한지에 관한 한 그때 조선은 일본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많은 지식인이 중국의 굴기(屈起)와 일본의 재무장, 그 와중에 일본을 은근히 밀고 있는 미국의 틈새에서 우리 입지가 좁아지고 있는 지금이 그때와 다름이 없다고 한다. 우리에게 그런 지도자가 있는가? 지금 일본의 우경화를 이끌고 있는 아베는 그런 지도자의 반열에 들 수 있는가? 그 긴 물음을 가슴에 안고 천 리 길 답사기행을 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