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니어 수필] 화로

겨울 하늘은 맑은 날 보다는 흐린 날이 더 많다. 그러니 흐린 날은 자연히 눈을 기다리고 괜스레 커피 한 잔을 들고 내 안에 드는데 오늘도 그렇다.
 
일요일이라 딱히 할 일도 없는 한가로운 오후, 요즘 생긴 버릇대로 커피 대신 믹스 된 대추차와 쌍화차를 한꺼번에 컵에 털어 넣는데 틀어 놓은 라디오에서 귀에 익은 달콤한 멜로디가 흘러나온다. 가만히 귀 기울여보니 라이처스 브러더스의 'Unchained Melody'다.

문득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이 'Unchained Melody' 영화에서 스웨이지와 그의 여인역인 데미무어가 함께 진흙으로 도자기를 만드는 명장면은,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어 이 장면을 리메이크하고 패러디 했으니, 나에게도 아주 인상 깊은 장면으로 남아 있다.

특히 가만히 있지 못하고 늘 뭔가 시도해보는 호기심 많은 내가, 언젠간 꼭 하고 싶다는 항목에 이 도자기 배우는 것도 하나 더 추가했음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리하여 퇴직 후에 유유자적 도자기를 빚으며 사는 꿈을 꿨다.

그러나 그 게 어디 말처럼 쉬운 일인가. 아침, 저녁으로 직장 일에 가정 일에 뛰어 다니다보면, 늘 파김치가 되어 잠자리에 눕는 나로서는 꿈은 늘 꿈일 뿐이었다. 그런데 이번 드디어 도자기 배울 기회가 생겼다. 그것도 순전히 무료로 말이다. 눈이 번쩍 뜨인다. 여기 저기 먼저 배운 사람들에게 알아보니 도자기 강좌에 희망자가 너무 많아 신청순으로 자른다는 소식이다. 어쩌랴. 해 보고는 싶고, 쏟아지는 잠을 눈 비벼가며 아내고 사이트에 들어가 컴퓨터 앞에 앉아 있다가, 밤 12시가 되자마자 신청한 덕에 드디어 도자기를 배우게 됐다.
 
도자기 수업 첫날, 마음대로 만들어 보라며 나누어 주는 말랑말랑한 도자기 흙 한 덩이를 들고 무엇을 만들까 생각 하다가, 화로를 만들기로 했다. 요즘은 쓰이지 않는, 그래서 박물관에나 가야 볼 수 있는 화로를 만들어, 거기다 ‘꽁치를 구워먹으면 맛이 기막힐 거다.’ 라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실실 웃으며, 흙을 꾹꾹 눌러 밀대로 밀어 둥근 밑판을 만들고, 다시 긴 직사각형을 만들어 밑판에 세워 붙이고, 화로 구멍을 만들기 위해 작은 칼로 살살 도려내었다.

자기 작품을 만드느라고 골똘하던 사람들이 허리를 한 번 펴다가 내가 만드는 화로를 보고 입가에 미소를 머금기도 하고, 이 게 웬 뚱딴지 같은 일이냐고 눈을 크게 뜨기도 하더니 더는 못 참겠는지 누가 묻는다.

“뭐 만드시는 거예요?“

“화로요. 화로 만들어서 꽁치 구워 먹으려구요.”

나의 엉뚱한 대답에 모두들 와르르 웃는다.
 
지금 생각해 보면, 느닷없이 화로 생각이 난 것은, 꽁치보다는 얼마 전에 산 취떡 탓일 게다. 그 옛날 우리 고향에서만 먹는 토속 음식인 취떡을 화로에 구우면 조금 센 불에 있는 부분이 노랗게 타며 부풀어 오르면서 온 방안에 고소한 누룽지 냄새랑 수리취의 향이 퍼져 나가고, 우리 오 남매의 목에서는 침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드디어 다 구워진 취떡을 하나씩 들고 먹으면 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장면이 아니었나 싶다.
 
내가 화로를 만든 게 거기에 꼭 꽁치를 구워 먹고, 취떡을 구워 먹으려고 해서는 아닐 게다. 많은 세월이 흘러가 각자 자기 생활에 바빠진 탓에 언제부터인가 소원해진 우리 오 남매의 정들이 그 화롯가에 오롯이 살아 있기 때문일 거라는 생각이 든다. 오늘 저녁에는 오빠와 동생들에게 안부 전화를 좀 넣어야겠다. 아무리 무소식이 희소식이라지만 ‘잘 지냈어.’ ‘잘 지내’ 라는 말이 그리운 건 나만이 아닐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