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 스토리] 골프장선 연습 스윙 딱 한번만… '원칙' 일깨워준 獨逸
입력 : 2014.01.08 03:00 | 수정 : 2014.01.08 03:12
[CEO가 말하는 내 인생의 ○○○] 방한홍 한화케미칼 대표의 독일 생활
10분 늦었다고 2시간짜리 교습 안해줘
기계값 할인 안돼… 융통성 없어 보여도 세계 최고 만든 산업 경쟁력의 원천
1988년 2월 독일지사로 발령받아 근무를 시작했다. 당시만 해도 해외지사 발령은 회사원으로서 커다란 행운이었다. 당시 올림픽 준비 열기로 뜨거웠던 우리나라는 아시아의 떠오르는 개발도상국이었지만 여전히 독일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독일은 우리와 비교할 수 없는, 특히 기계화학 산업에서는 세계 최고의 선진국이었다. 한국은 그저 '차붐의 나라' 정도로 알려졌던 때였다.
설레는 마음으로 독일에 도착했지만 현지 생활은 기대와 달랐다. 특히 지독하게 나쁜 날씨는 도무지 적응하기 힘들었다. 대중교통도 불편해서 외곽에서 시내로 들어오려면 버스와 전차를 몇 번씩 갈아타야 했다. 택시는 미리 예약을 해야 하고 그마저도 비싸서 마음대로 이용할 수 없었다. 독일어도 잘 모르는 데다 교통체계도 익숙하지 않아 지하철을 거꾸로 타거나 버스를 놓쳐 지각하는 경우가 잦았다.
결국 출퇴근을 위해 차를 장만하기로 하고 주행 실습에 나섰다. 여전히 교통체계에 익숙지 않아 몇 번 약속 시각보다 조금 늦었다. 그럴 때마다 강사는 웃으며 "미안하다, 너무 늦어서 오늘은 가르칠 수가 없다"고 했다. 고작 10분 정도 늦었는데 2시간 교습을 다 안 한다는 것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 항의도 해봤지만 통하지 않았다. 아무리 원칙을 중시하더라도 이방인에게 이 정도는 너무 심하다 싶었지만 도리가 없었다. 그냥 운이 없어 조금 '유별난 독일인'을 만난 것이려니 생각하고 넘어갔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많은 독일인을 만나다 보니 그가 유별난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원칙을 철저하게 지키는 문화는 모든 독일인의 몸속에 뿌리 깊이 배어 있다는 것을 어디서든 경험할 수 있었다.
본사 공장에서 쓰는 압출기(extruder)를 구매할 때였다. 독일 부임 후 첫 대형 구매 건이라 의욕이 충만했다. 구매하기로 한 기계는 세계 최고의 품질로 유명한 독일 브랜드. 그 대신 가격도 비쌌다. 영업 담당 매니저와 몇 번 만나면서 계속 "100만마르크(당시 환율로 5억원)를 깎아달라"고 했다. 기계 값(20억원)에 비하면 그리 과한 금액도 아니었고 구매 가격을 절충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그런데 독일인 매니저는 내 제의가 무례하게 들렸는지 "가격을 깎으면 제공되는 기계의 부품 범위가 줄어든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나도 물러서지 않았다. "이번 가격 인하 요구를 받아주면 다음번에 더 많은 구매를 하겠다"고까지 했지만 그들은 완고했다. '세일즈 하는 사람이 이렇게 융통성이 없을까' 싶었다. 안 되겠다 싶어 한발 물러서 100만마르크까진 아니어도 조금이라도 깎아달라고 했지만 그마저 통하지 않았다. 협상은 결국 결렬됐다.
비즈니스 현장에서도 '정'과 '융통성'이 통하는 한국식 문화와는 너무 달랐다. 하지만 세일즈 하는 입장임에도 협상 테이블에서 당당한 그들의 모습은 일견 부러웠다. 그들의 원칙주의는 융통성이 없는 것도, 허세도 아니었다. 품질만큼은 세계 최고라는 자부심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 원칙주의는 세계 최고의 품질을 가능하게 하는 선순환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독일인의 합리적인 원칙주의의 바탕에는 페어플레이 의식이 깔려 있다. 하루는 휴일에 동료들과 골프장에 갔다. 공을 치기 전 연습 스윙을 몇 번 했더니 골프장 감독관이 곧바로 항의를 했다. 왜 그러느냐고 묻자 "연습은 연습장에서 하라, 여기는 경기하는 곳"이라며 "연습 스윙으로 시간이 조금이라도 지체되면 뒤쪽 경기자가 경기에 지장을 받는다"고 했다. 골프장에서 연습 스윙은 한 번만 하는 것이 독일에서는 불문율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초보자도 특별한 절차 없이 바로 골프를 칠 수 있지만, 독일에선 반드시 핸디캡 증명서가 있어야만 한다. 초보자가 잘못 쳐서 빗맞은 공에 행여 다른 이가 맞는 것을 방지하려는 것이다.
융통성 없을 정도로 원칙을 중시하는 독일인들의 특성엔 평가가 엇갈린다. 세계 최고의 산업국가를 만들었지만, 완고한 탓에 시대 변화에는 적절히 대처하지 못했다는 시각도 있다. 하지만 일회용 라이터 하나를 만들어도 하루, 1년치 평균 사용 횟수를 계산하고 거기에 120%의 성능으로 1년을 쓸 수 있게 만든다던 한 기업인, 기계에 혼을 불어넣기 위해 겨울에도 장갑을 끼지 않는다던 기계공 등 현지에서 만난 독일인들이야말로 산업 선진국을 만드는 진짜 독일인이었다.
4년간의 독일 생활은 독일은 물론 서구사회 문화와 가치관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할 수 있게 해 준 시기였다. 시간이 지나고 보니 그것이 독일뿐 아니라 유럽, 미국 등 주요 선진국의 보편적인 문화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변화도 좋고, 혁신도 좋고, 창조도 좋지만 그보다 먼저 기본적인 것, 그래서 어쩌면 잊고 있는 원칙이 결국 기업과 사회와 국가의 경쟁력으로 이어지는 게 아닐까 싶다.
독일에서 근무하던 때가 20년이 넘었으니 그때와 지금은 많은 차이가 있을 것이다. 그래도 기본은 변하지 않는 것이라 생각한다. 원칙을 중시하되 합리적이고, 근면 성실함은 지금 위기를 돌파하는 데 다시 새겨봐야 할 덕목일 것이다.
[방한홍 대표는] 태극권 고수… 직원과 한 달에 네번 아침 같이 먹어
방한홍(龐漢弘·61) 한화케미칼 대표이사는 1981년 한양화학(현 한화케미칼)에 입사해 31년 만인 2012년 CEO 자리에 올랐다. 서울 출신으로 경기고와 한국외대 행정학과를 졸업한, 화학업계에선 보기 드문 문과 출신 CEO다.
30년 넘게 화학 영업 분야에 몸담아온 영업통으로 특유의 친화력으로 유명하다. 영업맨 시절, ‘방한홍이 온다’고 하면 거래처에선 ‘우리 말 잘 들어주는 사람이 오는구나’ 하고 기대할 정도였다고 한다.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소통(疏通). CEO 취임 이후 서울 본사와 대전·여수·울산공장을 매주 돌면서 한 달에 네 번씩 직원들과 조찬을 함께하는 ‘굿모닝 CEO’란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6개월마다 한 번씩 직원들을 대상으로 경영 설명회도 연다. ‘회사 정보를 공유해야 직원들이 주인의식을 가진다’는 생각 때문이다. 방 대표는 20년 이상 연마한 태극권으로 아침을 시작하는 ‘태극권 고수’이기도 하다. 현재 한국석유화학협회 회장을 맡고 있다.
설레는 마음으로 독일에 도착했지만 현지 생활은 기대와 달랐다. 특히 지독하게 나쁜 날씨는 도무지 적응하기 힘들었다. 대중교통도 불편해서 외곽에서 시내로 들어오려면 버스와 전차를 몇 번씩 갈아타야 했다. 택시는 미리 예약을 해야 하고 그마저도 비싸서 마음대로 이용할 수 없었다. 독일어도 잘 모르는 데다 교통체계도 익숙하지 않아 지하철을 거꾸로 타거나 버스를 놓쳐 지각하는 경우가 잦았다.
결국 출퇴근을 위해 차를 장만하기로 하고 주행 실습에 나섰다. 여전히 교통체계에 익숙지 않아 몇 번 약속 시각보다 조금 늦었다. 그럴 때마다 강사는 웃으며 "미안하다, 너무 늦어서 오늘은 가르칠 수가 없다"고 했다. 고작 10분 정도 늦었는데 2시간 교습을 다 안 한다는 것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 항의도 해봤지만 통하지 않았다. 아무리 원칙을 중시하더라도 이방인에게 이 정도는 너무 심하다 싶었지만 도리가 없었다. 그냥 운이 없어 조금 '유별난 독일인'을 만난 것이려니 생각하고 넘어갔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많은 독일인을 만나다 보니 그가 유별난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원칙을 철저하게 지키는 문화는 모든 독일인의 몸속에 뿌리 깊이 배어 있다는 것을 어디서든 경험할 수 있었다.
본사 공장에서 쓰는 압출기(extruder)를 구매할 때였다. 독일 부임 후 첫 대형 구매 건이라 의욕이 충만했다. 구매하기로 한 기계는 세계 최고의 품질로 유명한 독일 브랜드. 그 대신 가격도 비쌌다. 영업 담당 매니저와 몇 번 만나면서 계속 "100만마르크(당시 환율로 5억원)를 깎아달라"고 했다. 기계 값(20억원)에 비하면 그리 과한 금액도 아니었고 구매 가격을 절충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그런데 독일인 매니저는 내 제의가 무례하게 들렸는지 "가격을 깎으면 제공되는 기계의 부품 범위가 줄어든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나도 물러서지 않았다. "이번 가격 인하 요구를 받아주면 다음번에 더 많은 구매를 하겠다"고까지 했지만 그들은 완고했다. '세일즈 하는 사람이 이렇게 융통성이 없을까' 싶었다. 안 되겠다 싶어 한발 물러서 100만마르크까진 아니어도 조금이라도 깎아달라고 했지만 그마저 통하지 않았다. 협상은 결국 결렬됐다.
비즈니스 현장에서도 '정'과 '융통성'이 통하는 한국식 문화와는 너무 달랐다. 하지만 세일즈 하는 입장임에도 협상 테이블에서 당당한 그들의 모습은 일견 부러웠다. 그들의 원칙주의는 융통성이 없는 것도, 허세도 아니었다. 품질만큼은 세계 최고라는 자부심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 원칙주의는 세계 최고의 품질을 가능하게 하는 선순환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독일인의 합리적인 원칙주의의 바탕에는 페어플레이 의식이 깔려 있다. 하루는 휴일에 동료들과 골프장에 갔다. 공을 치기 전 연습 스윙을 몇 번 했더니 골프장 감독관이 곧바로 항의를 했다. 왜 그러느냐고 묻자 "연습은 연습장에서 하라, 여기는 경기하는 곳"이라며 "연습 스윙으로 시간이 조금이라도 지체되면 뒤쪽 경기자가 경기에 지장을 받는다"고 했다. 골프장에서 연습 스윙은 한 번만 하는 것이 독일에서는 불문율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초보자도 특별한 절차 없이 바로 골프를 칠 수 있지만, 독일에선 반드시 핸디캡 증명서가 있어야만 한다. 초보자가 잘못 쳐서 빗맞은 공에 행여 다른 이가 맞는 것을 방지하려는 것이다.
융통성 없을 정도로 원칙을 중시하는 독일인들의 특성엔 평가가 엇갈린다. 세계 최고의 산업국가를 만들었지만, 완고한 탓에 시대 변화에는 적절히 대처하지 못했다는 시각도 있다. 하지만 일회용 라이터 하나를 만들어도 하루, 1년치 평균 사용 횟수를 계산하고 거기에 120%의 성능으로 1년을 쓸 수 있게 만든다던 한 기업인, 기계에 혼을 불어넣기 위해 겨울에도 장갑을 끼지 않는다던 기계공 등 현지에서 만난 독일인들이야말로 산업 선진국을 만드는 진짜 독일인이었다.
4년간의 독일 생활은 독일은 물론 서구사회 문화와 가치관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할 수 있게 해 준 시기였다. 시간이 지나고 보니 그것이 독일뿐 아니라 유럽, 미국 등 주요 선진국의 보편적인 문화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변화도 좋고, 혁신도 좋고, 창조도 좋지만 그보다 먼저 기본적인 것, 그래서 어쩌면 잊고 있는 원칙이 결국 기업과 사회와 국가의 경쟁력으로 이어지는 게 아닐까 싶다.
독일에서 근무하던 때가 20년이 넘었으니 그때와 지금은 많은 차이가 있을 것이다. 그래도 기본은 변하지 않는 것이라 생각한다. 원칙을 중시하되 합리적이고, 근면 성실함은 지금 위기를 돌파하는 데 다시 새겨봐야 할 덕목일 것이다.
[방한홍 대표는] 태극권 고수… 직원과 한 달에 네번 아침 같이 먹어
방한홍(龐漢弘·61) 한화케미칼 대표이사는 1981년 한양화학(현 한화케미칼)에 입사해 31년 만인 2012년 CEO 자리에 올랐다. 서울 출신으로 경기고와 한국외대 행정학과를 졸업한, 화학업계에선 보기 드문 문과 출신 CEO다.
30년 넘게 화학 영업 분야에 몸담아온 영업통으로 특유의 친화력으로 유명하다. 영업맨 시절, ‘방한홍이 온다’고 하면 거래처에선 ‘우리 말 잘 들어주는 사람이 오는구나’ 하고 기대할 정도였다고 한다.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소통(疏通). CEO 취임 이후 서울 본사와 대전·여수·울산공장을 매주 돌면서 한 달에 네 번씩 직원들과 조찬을 함께하는 ‘굿모닝 CEO’란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6개월마다 한 번씩 직원들을 대상으로 경영 설명회도 연다. ‘회사 정보를 공유해야 직원들이 주인의식을 가진다’는 생각 때문이다. 방 대표는 20년 이상 연마한 태극권으로 아침을 시작하는 ‘태극권 고수’이기도 하다. 현재 한국석유화학협회 회장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