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

“인덱스에서 하면 금세 돼요.” 차 한 잔 함께하자 청하시기에 선배 댁에 놀러 갔더니 냉장고에서 이것저것 꺼내셨다. 뭔가 요리를 해서 아예 한 상 차려주시려는 눈치였다. 말려도 소용없기에 뭐든 도와드리겠다며 일어서려는 나를 선배는 ‘인덱스’를 들먹이며 도로 의자에 눌러 앉혔다. 

가만있는 게 도와주는 거라며. 그런데 웬 인덱스? 목록이나 지수를 가리키는 이 단어가 어째서 부엌일 가운데 나오는 건지 의아했지만, 선배 말마따나 가만있는 게 돕는 것 같아 입 다물고 있었다. 갖가지 나물을 얹은 밥에 두부를 으깨 넣은 양념장까지 곁들인 비빔밥이 뚝딱 식탁에 올랐다. 맛있는 식사를 마치고 난 후 디저트는 내가 사 들고 간 치즈케이크와 선배가 내린 커피.

“아프리카로 할래요?” 선배의 물음에 “아프리카란 커피가 새로 나왔어요?” 절로 물어보게 됐다. “아니, 늘 마시는 건데….” “아, 아메리카노 말이죠?” 그제야 선배는 아메리카노를 아프리카로 잘못 말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내가 이렇다니까” 해서 함께 웃었다. 그 김에 ‘인덱스’도 물어보니 가스레인지 대신이란다. “아, 인덕션이요!” 순간 우리는 다시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단어 앞머리라도 생각나고 있으니 아직은 희망이 있는 셈’이라며 선배는 계단을 내려가다 말고 ‘지금 내가 내려가는 중인지, 올라가는 중인지’를 몰라 한참을 그대로 서 있었다는 한 친구의 얘기도 들려줬다. 웃음이 또 이어졌지만, 그 밑바닥 우리 마음에는 무엇인가가 똬리를 틀고 있는 듯했다. 

막연한 두려움이랄까. ‘나는 안 걸릴 것’이라고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바로 치매에 대한 두려움이다. 70대라고 선배가 더 가능성이 있는 것만은 아니다. 최근 들어 나 같은 50대뿐 아니라 젊은 치매 환자도 늘어나고 있다지 않은가.

최근 기억, 옛날 기억

지난 10월 개최됐던 서울 국제시니어엑스포에서 얻어 온 ‘두뇌 안티에이징’ 팸플릿을 열어보니 치매까지는 아니지만 ‘경도 인지장애’가 있다. 기억력 일부가 비정상적으로 낮아지는 증상이다. 건망증을 호소하는 50대 이상 환자 가운데 열에 하나가 여기 해당하고, 이 중 또 열에 하나는 1년 내 초기치매가 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뇌 신경 세포를 죽이는 독성물질인 ‘베타아밀로이드’가 쌓이거나 혈류순환이 나빠지면 단기 기억을 장기 기억으로 바꾸는 해마 세포가 손상을 입게 된다고 한다. 그러면서 최근 일부터 기억나지 않게 된다니 옛날 기억이 좋다고 해서 안심할 것도 아닌 모양이다.

나 또한 어제 무얼 입고 외출했었나, 무얼 먹었나 생각나지 않을 때가 종종 있는 터라 건망증과 치매의 차이에 대해 관심이 크다. 팸플릿의 설명은 이러했다. ‘친구와 만나기로 한 약속을 잊어버렸다’는 사실을 들었을 때 건망증은 “아~맞아. 미안해”라고 기억해 낸다. 하지만 치매 초기라면 전화통화로 약속했던 일을 상기시켜도 “약속을 했었다고? 우리가 전화를 했었어?”하는 식으로 그 일 자체를 기억해내지 못한다. 그렇다면 선배처럼 나도 아직 희망이 있는 셈이다. 한참을 지나, 더러는 하루가 지나서라도 마침내 기억이 나니 말이다.

고통받는 가족 수 4백만

국립중앙치매 센터의 기억력 체크 10가지 질문을 보면 첫 번째가 ‘최근에 일어난 일을 기억하는 게 어려운가?’다. 며칠 전의 대화내용이나 약속, 친한 사람의 이름, 물건 둔 곳을 기억하기 어려운가도 묻는다. 또, 이전에 비해 물건을 자주 잃어버리는가, 집 근처에서 길을 잃은 적이 있는가, 가게에서 사려는 두세 가지 물건의 이름이나, 가스 불과 전깃불 끄기, 자주 사용하는 전화번호 기억이 어려운지도 묻는다. 

이 중 반 이상이 ‘예’라면 가까운 보건소를 찾아 기억력 검사를 받아보라고 권고한다. 치매는 조기 발견하면 약물치료만으로도 그 효과를 극대화시킬 수 있고, 관리를 통해 발병 시점을 최대한 지연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15분마다 1명씩 치매 환자가 발생하고 있다고 한다. 2013년 현재 65세 이상 실버세대 614만 명 가운데 57만 명이 치매 환자로 집계되고 있다. 5가구 중 1가구가 치매 가족인 셈이라니 그 배우자며 자녀 등 가족들의 고통은 또 오죽할까. 젊은이라고 예외는 아니지만 나이 들수록 더 흔히 발병하는 게 치매다. 당연히 수명 1백세 시대에 치매 환자 수도 크게 늘어나면서 10년 후에는 1백만 명이 넘을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이로 인해 고통 받는 가족의 수는 4백만 명에 이를 것이라니 정말 남의 일이 아니다.

최상의 치료는 예방이란 점은 치매 역시 마찬가지다. 무엇보다 생활습관이 중요하다. 예방접종법이 나와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두뇌활동을 위해 책을 읽고, 글을 쓰거나, 퍼즐 맞추기처럼 머리를 쓰는 오락, 금연과 절주, 운동과 숙면이 요구된다. 꾸준한 사회활동과 뇌에 좋은 식습관도 따라야 한다. 견과류를 비롯해 등 푸른 생선, 블루베리, 시금치, 카레, 커피, 콩, 현미와 잡곡류, 해조류, 홍삼은 ‘브레인 푸드’ 10가지로 꼽힌다. 만약 치매가 의심된다면 지체 없이 보건소에서 검진부터 받을 일이다. 국가가 법률에 의해 관리하는 질환은 암과 치매밖에 없는 만큼 도움되어줄 기관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

아름답지만 쓸쓸한 여운

초등학생 시절, 국어 교과서에 실려 있었던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한 이야기가 떠오른다. 저녁 무렵 동네 아이들이 느티나무 밑 평상으로 옹기종기 모여들었다. 한 아이가 질문을 꺼낸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게 뭘까?”

호랑이, 귀신, 도깨비 등등 아이들은 제각각 답을 말하지만, 결론이 나지 않는다. 서로 얼굴만 바라보고 있던 아이들은 지나가는 어른들에게 물어보기로 한다. 어떤 어른은 수소폭탄이 제일 무섭다, 그거 하나면 전 세계가 잿더미가 된다고 했다. 이윽고 노을도 사라지고 사방에 땅거미가 질 즈음 백발의 노인이 나타난다. 아이들은 마지막으로 묻기로 한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무엇이냐고. 노인은 말한다.

“망각이란다.”

뜻을 모르는 아이들은 고개를 갸우뚱한다.

“사람은 늙으면 모든 것을 잊지. 젊은 날의 소중한 기억도, 사랑하는 사람은 물론 사랑하는 마음조차 잊게 된단다.”

땅거미는 더욱 짙어지고 노인도 아이들도 뿔뿔이 흩어져 집으로 간다. 짙어지는 땅거미, 흩어지는 사람들…. 망각을 상징하는 영화의 한 장면인 듯 아름답지만 쓸쓸한 여운이 오래도록 나의 뇌리에 남아있다. 괴로움을 잊고 살아가게도 하지만 괴롭게도 만드는 망각, 준비할 수밖에 없다. 그래야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의 자리를 기꺼이 내어주게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