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밤은 길다. 사람들도 오가지 않는다. 이맘때 멧돼지가 내려오면 아무도 모를 텐데. 산짐승이 날씨를 견디는 것을 보면 참 대단하다. 먹을 것도 적을 텐데 어떻게 견딜까? 간간이 어디서 개 짖는 소리다. 다시 조용하다. 세상은 고요해졌다. 밤이 길게 열렸다.
겨울이 길고 추운 만큼 피부는 수분을 더 잃을 거다. 피부색이 노랗다. 가을 톤의 색을 입어야 좋다고 한다. 옷을 두껍게 입고 다녀도 웬일인지 4주 넘게 감기가 껌딱지 같이 붙어 다닌다. 찬바람만 쐬면 기침이 경련한다. 이비인후과도 꽤 유명한 곳을 다녔는데 안 낫는다. 그래서 청진기를 꼭꼭 등 뒤에 4번을 찍는 내과 의사를 찾는다. 유엔 평화 유지군 같은 파란색 캡슐을 쓴 약에 기침이 잦아든다. 이 정도면 밤을 꼬박 새워도 끄떡없을 것 같다.
WSJ 뉴스를 귀에 꽂는다. 2년이 넘은 습관이다. 꼬부랑말이 안 들려도 강박 관념은 이미 없다. 그냥 듣는다. 2년이 지나도 소리가 들렸다 안 들렸다 한다. 그래도 내버려두었다. 삼 개월이 더 흘렀다. 뭔가 다르다. 외국어를 생활에 쓰는 것은 숱한 사람들의 성공과 실패를 보았다. 그냥 타도 스키는 되지만 잘 타는 스키는 아니다. 외국어도 그런 거 같다. 처음부터, 제대로 배워야 제대로 들리는 거 같다.
낮에 유명 엔터테인먼트 회사의 사장 둘이 나와 어린 학생들의 가창력을 심사하는 프로그램을 잠시 보았다. 자기 목소리가 아니면 들어주기가 꽤 싫나 보다. 아마 외국어도 비슷할 거다. 체화되지 않은 부정확한 발성은 들어 주기가 몹시 어렵나 보다. 성수동 노룬산에 65번 한서교통 종점이 있었다. 거기는 나무판자로 지붕을 삼은 땅속에 움푹 파인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그 집에도 과외를 잠시 다닌 적이 있었지만 내가 영어를 처음 접한 곳은 노룬산 시장 근처에 있는 한 골목길의 군대도 안 갔던 고졸 청년이었다. 그에게서 초등학교 겨울 방학 때 ABC를 배웠다. 잘못 배운 발음을 고치기 위해 해묵은 음성학 책을 집어들고 자습했고, 원어민들에게 혀 위치며, 입술 모양을 묻기도 했다. 어려서 배워야 할 것을 나이 들어서 바로 잡느라고 재탕하는 것은 경제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이 얼마나 낭비인가.
오늘 들은 비디오 기사에 잠깐 서운했다. 늘상 화면에서 보던 WSJ의 저명한 경제전문 기자인 데이비드 웨슬(David Wessel)이 미국 브루킹스 연구소의 허친스 센터로 옮긴다고 한다. 데이비드 웨슬 기자는 ‘단기적으로는 미국 경제가 매우 걱정스럽다. 향후 몇 년은 흔들릴 거다’고 말했다. ‘나는 내 저서나 기사 구독자에게 내가 미국 경제의 장기적 전망에 비관적이라는 인상을 주는 게 아닐까 늘 조심스럽다’고 말했다.
그는 ‘미국은 20대의 청년들이 있다. 이 중산층의, 대학 교육을 한 애들과 친구들을 보면 미국을 비관적으로 보기 정말 어렵다. 이 애들은 미국 사회가 쇠퇴 중이라는 메시지를 아직 안 받은 것 같다. 그냥 매진 중인데, 이런 게 우리의 희망이라고 본다. 이 말이 센티멘틀하게 들리겠지만, 저쪽 실리콘밸리 사람들이 틀림없이 10년 안에 삶을 변화 시킬 별의별 소프트웨어를 발명 중이다. 세상 어디에도 이런 혁신의 온상(hot bed of innovation)을 가진 나라는 없다"고 끝에 밝힌다고 했다.
웨슬은 브루킹스 연구소의 허친스 센터(Hutchins Center for Fiscal and Monetary Policy)를 운영한다고 한다. 웨슬 기자는 미국의 중산층이 약해진 원인을 크게 두 가지로 꼽았다. 첫째는 미국 경제 성장률이 90년대 이후 낮아진 것과, 둘째로 성장의 과실이 상류사회, 최고의 교육을 많이 받은 일각, 금융권에 지나치게 쏠려서 균등한 배분이 안 된 거로 보았다.
데이비드 웨슬은 일본은 좋은 혁신가(good innovator)가 아님이 드러났다고 했다. 그는 일본에 대해 '재화(things)를 아주 효율 있게 만드는 방법에는 능했지만, 전반적인 소프트웨어 혁명(software revolution)과 신뢰성 높은 웹 기반 제품(web stuff)의 개발은 일본이 초월(卓越)한 분야가 아니고, 일본 사회는 현대 경제에 대응하기에 너무 경직된 사회'로 지적했다.
중국은 '인류 역사에 전례가 없게 30년간 10%씩 매년 성장한 나라'로 높이 평가하였지만 '빈부의 격차가 커가고 이걸 해결하지 못하면 중국은 상처를 입을' 거로 내다보았다. 데이비드 웨슬이 동료 제리 사이브기자와 간략한 소회를 밝힌 이번 인터뷰는 위와 같다. 그가 미국의 힘을 소프트웨어로 본 것을 한국도 유념해야 할 것 같다.
일본은 세계 2차 대전에 학교 선생님은 징집하지 않았다고 한다. 미래를 대비해서다. 한국도 백남준의 말마따나 판타지가 엄청난 나라라고 믿는다면 한국의 자라나는 청년 세대의 싹은 유전자부터 유연한 사고의 소유자로 간주할 수 있겠다.
춘하추동의 사계(四季)는 한국인의 비입체적인 얼굴에 그대로 녹아 들어갔다. 아줌마라는 말은 세계 어디에도 없는 한국 여성의 가정에서나 사회에서의 실질적인 파워를 보여준다. 부존자원도 없는 한국을 기성세대가 일구었다. 이제는 재래의 산업 사회가 아니다.
트위터, 페이스북, 구글, 애플이 지구 반대편의 정치 판도를 바꾸거나 세계인의 모든 것을 스마트폰의 화면으로 부처님 손바닥의 손오공 들여다보듯 할 수 있고, 무인 자동차며 가상 세계가 현실화되고, 손안에 스마트한 세상을 최초로 열었다.
여기까지가 끝이 아니란 말을 웨슬은 하고 있다. 앞으로 10년을 더 바꿀 소프트웨어의 폭풍이 몰려오고 있다는 메시지를 그에게서 간접적으로 들을 수 있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나? 학교, 국회, 정부, 기업은 다 어디에 있는 건가? 백남준은 한국인의 판타지를 크게 쳐주었다.
백남준 자신도 한국인의 판타지의 한 맥락이다. 실리콘 밸리 말고도 태평양 건너 지금 서울 여기 어디에서도 인류의 역사를 뒤바꿀 혁신이 싹터야 한다. 마치 6.25의 폐허에서 반도체, 자동차, 제강, 조선, 건설의 장미가 피어올랐던 것같이 21세기의 소프트웨어는 피긴 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