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관료로 오를 수 있는 최고의 정점을 치닫고 있을 때 그의 몸은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목 부분의 디스크 이상에서 비롯된 증상은 치유 불능의 상태에 빠져들고 있었지만, 그는 수술대에 눕기를 거부하고 자연 속에서 스스로 치유하는 길을 택했다. 93년부터 그렇게 시작된 주말 야간산행은 5년간이나 계속됐다. 포천, 양평, 가평에서 강화도까지, 경기도 일원의 산은 무른 메주 밟듯이 훑고 다녔다. 덕분에 전반적인 건강은 양호해졌지만, 목 부분의 이상은 호전되지 않아 결국 98년에 수술을 받았고 그 이듬해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그렇게 낙향한 그가 찾은 곳은 경기도 양평군 옥천면 용천리 대부산 중턱 계곡이었다. 인근의 카페를 우연히 찾았다가 경관이 하도 좋길래 “이렇게 좋은 곳에서 혼자만 즐기지 말고 나도 좀 터를 달라”고 주인을 졸라 230평을 구입, 서울 아파트를 처분한 자금으로 2000년 5월부터 집을 지어 그해 9월 입주했다.
그동안 그의 집을 다녀간 지인들만 해도 줄잡아 3백여 명. 청와대 경제수석으로 보좌했던 YS도 여섯 번을 다녀갔다. 그래서 한때 YS캠프의 사랑방처럼 비치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음식 솜씨 좋은 그의 아내 손맛에 반해서 오고 또 오는 사람들이다. 터가 계곡이라 제대로 다리를 뻗고 앉을 평평한 땅 한 뼘이 없어 소형 포크레인을 빌려 직접 운전을 배워 고르고 다져 지금의 정원도 다 만들었다. 수염도 깎지 않고 마당 일을 몇 달 동안 했더니 이웃집 촌노가 그를 보고 ‘할아버지’라고 부르더란다. 무지렁이처럼 그렇게 흙 속에 뒹굴던 그가 한때 이 나라 경제를 주름잡던 실세였다는 사실을 알아본 이웃은 거의 없었다.
“사회적 신분이나 그에 따르는 대접이라는 것은 현직에 한정되는 것이고 그 자리를 떠나면 어디에 서 있을까 하는 것을 끊임없이 생각하고 연습해야 해요. 그래야 현직에 있을 때도 당당해지고 물러난 뒤에도 바로 제자리를 찾을 수 있는 거예요.”
사회로부터 잠시 빌리고 있던 명예를 돌려주고 나면 범인의 삶으로 바로 돌아와야지 쓸데없이 도시의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앉아 있는 것은 추한 모습으로 남을 것 같아 낙향했고 그렇게 닦아둔 자리가 있었기 때문에 평상심을 찾기가 쉬웠다고 한다. 그렇지만 도시와 너무 떨어져 은둔의 삶을 사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고 했다. 1시간 정도의 거리를 두고 친구들과 부담 없이 왕래할 수 있는 거리를 유지하면서 도시를 서서히 정리하는 기간이 필요하다고 충고했다.
한때 이 나라의 파워엘리트 그룹에 속했던 대부분의 높으신 분들이 물러난 뒤에도 그 세계에 그대로 남아 막후의 영향력을 과시하며 전관예우의 특권을 은근히 즐기며 살아가고 있는 세태에서 그의 선택은 확실히 유별나 보인다. 워낙 대접받고 사는데 익숙한 사람들이 낮은 데로 내려오는 것이 쉽지는 않겠지만 그런 생활을 서슴없이 받아들이는 한때의 높으신 분들이 늘어나면 우리가 사는 세상도 조금은 살맛이 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