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건물, 용도를 공모합니다

몇 년 사이 서울 도심엔 건축가가 설계한 개성 있는 문화 공간이 많아졌다. 스타일리시한 공간에서 커피 들이켜며 문화를 향유하는 젊은이들의 모습은 이제 낯익은 풍경이 됐다. 하지만 서울을 조금만 벗어나도 상황은 다르다. 여전히 문화의 향기라곤 맡을 수 없는 사각지대가 널렸다.

인천 가좌동도 그런 곳이다. 오래된 공업 지역으로 목재소, 티타늄 공장, 사료 공장 같은 크고 작은 공장과 아파트가 혼재해 있다. 산업화와 도시화 사이, 문화는 소외됐다. 이곳에 최근 생경한 건물 하나가 들어섰다. 폭 4m, 길이 20m의 길쭉한 회색 노출 콘크리트 3층 건물. 속이 훤히 보이도록 한 면 전체에 창을 달았고, 지그재그 형태의 기하학적인 나무 계단도 달렸다. 부부 건축가 임형남·노은주(가온건축) 소장이 설계한 건물 '신진말'이다. 신진말은 가좌동 일대를 가리키던 옛 지명이다.

"보세요. 주위가 휑하잖아요. 황무지에 나무 한 그루 심는 걸 시작으로 개간하는 농부의 심정을 떠올렸습니다. '문화 황무지에 책 한 권 꽂아 넣자'면서 시작했어요. 땅 모양도 딱 그렇게 생겼고." 최근 이 건물에서 만난 두 건축가와 건축주 심기보(34)씨가 미소를 주고받으며 말했다. 디자인도 신기하지만, 더 놀라운 건 이 멋진 건물의 구체적인 쓰임이 아직 결정되지 않았단 사실이다. 구체적인 건물 용도를 정해놓고, 그에 맞춰 건물 디자인을 하는 게 상식적인 순서. 하지만 이 건물은 반대다. 이 비상식적인 프로세스는 '덤으로 생긴 땅'에서 출발했다.

"원래 여기가 저희 가문이 400년 넘게 소유해온 땅입니다. 작은 구멍가게가 있었는데 그냥 사용하시게 했죠. 2년 전 그분들이 나가면서 이 땅이 생긴 거죠. 대대로 내려온 땅인데, 돈 버는 데 쓰지 말고 지역사회를 위해 쓰면 어떨까 생각했습니다. 집안 어른들도 흔쾌히 동의하셨고요." 건물 옆에서 고깃집을 하는 건축주 심씨가 수줍게 말했다. 신축 건물 바로 옆엔 그의 집안이 17세기에 지어 지금까지 소유하고 있는 오래된 한옥이 있었다. 심씨는 "우리 조상이 그랬듯 내가 이 지역사회에 할 수 있는 일을 고민해봤다"며 "그러다가 좋은 건물을 지어 지역 주민과 함께 나누고, 이 지역에 문화 자극을 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일종의 '공간 나눔'이었다.

지역사회를 위해 기꺼이 공간을 열겠다는 속 깊은 건축주를 만난 운 좋은 건축가들은 더욱 사명감을 느꼈다. 그들은 '전통과 현대', '산업화와 도시화'가 혼재된 땅의 콘텍스트(맥락)를 디자인으로 담았다. 도로 쪽 입구엔 창덕궁 연경당 앞에 있는 불로문(不老門)을 본떠 만든 문을 달았다. '또 다른 세상으로의 인도'를 은유하는 장치였다. 그 옆으로 건축주 집안이 보관하고 있던 기와를 차곡차곡 쌓아 이 터에 켜켜이 쌓인 '시간'을 표현했다. 3층엔 한옥에서 볼 수 있는 '들어열개문'(들어 올려 위에 거는 문)을 현대적으로 해석한 가로 3m, 세로 4m 철제 격자창을 달았다. 창은 도르래를 이용한 활차(滑車)로 열게 했다. 인더스트리얼 디자인(산업시대 느낌이 나는 디자인)으로 공업지대라는 '지역성'을 표현한 것이다. 이 창 밖으로 건물 주변 공장과 건축주 집안의 한옥이 함께 보인다. 혼재된 역사를 보여주는 창인 셈이다.

건축주와 건축가는 "건물은 완공됐지만 건물의 진짜 생명은 이제부터"라고 했다. "저소득층 주민들이 '작은 결혼식'을 열 수 있도록 공간을 빌려주는 것도 생각하고, 지역 문화인들의 전시도 염두에 두고 있어요. 그런데 아직은 아이디어가 턱없이 모자라네요. 어디 좋은 아이디어 없을까요?" 건물에 문화를 불어넣어 '지역의 문화 스위치'를 켜고 싶다는 이 세 사람을 저 멀리 공장 굴뚝이 그윽이 내려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