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e 스토리] 은행장 비서에서 최초의 여성 은행장으로… 35년 동안 노력과 오기로 '유리천장' 뚫어

1980년 어느 날 아침 7시, 서울 을지로 기업은행 본점 12층 은행장실. 아무리 쓸고 닦아도 좀처럼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책상 위에 올려놓은 신문은 행장님이 보시는 순서대로 가지런히 배열됐는지, 쓰레기통은 깨끗이 비워졌는지, 소파 방석이나 등받이가 흐트러지지는 않았는지. 몇 번이나 확인하고 나서야 행장실을 나와 내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당시 은행장실은 어찌나 넓었던지 아침 일찍 출근해 정리를 하고 나면 이마엔 항상 땀이 맺혔다.

2014년 1월 6일. 30년 만에 같은 은행장실에 들어섰다. 매일 쓸고 닦던 곳을 지나 곧장 책상으로 가서 의자에 앉았다. 30년 전엔 감히 앉아볼 생각도 못했던 바로 그 의자. 30년 전 은행장 비서실 대리였던 나는 지금 24대 기업은행장이 됐다.

최초의 여성 은행장. 요즘 내가 가장 많이 듣는 타이틀이다. 1978년 평사원으로 입사해 35년을 기업은행에서만 일한 끝에 얻은 영광이다. 그사이 참 많은 업무를 담당했다. 동대문 지점 주임으로 시작해 여러 지점과 본점 부서를 거쳤다. 그러면서 기업은행 최초 여성 본부장, 최초 여성 부행장 같은 행 내 최초 여성 타이틀을 차곡차곡 쌓아왔다. 어떻게 보면 지난 세월은 여성에게만 보인다는 '유리천장'과의 지난한 싸움이었고, 여러 '최초' 타이틀은 적어도 '당신은 최선을 다했다'는 점을 인정받은 훈장과도 같다.

여러 '최초'라는 타이틀 중 내가 가장 아끼는 것은 '첫 여성 외환담당 대리'였다. 내가 처음으로 뚫은 유리천장이면서 정말 하고 싶었던 일을 하게 된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1978년 2월 20일 기업은행에 들어오면서 1차 근무 희망지를 외화자금부, 2차 근무 희망지를 국제영업부로 적어낼 정도로 외환업무에 관심이 많았다. 그러나 오래도록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기업을 상대하는 외환업무는 남자만 할 수 있는 일이란 편견 때문이었다. 하고 싶다고 인사 담당자를 상대로 떼를 쓸 수는 없는 노릇. 결국 내게 주어진 일을 완벽하게 처리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결국 기회가 왔다. 1985년 9월 7일. 그토록 원하던 광화문 지점으로 발령을 받았다. 당시 기업은행 광화문 지점은 우리나라 수출액의 500분의 1을 처리할 정도로 외환 거래 규모가 컸다. 8년 차 직원으로서 남자 후배들에게 질 수 없었다. 모르는 것은 집에서 밤늦도록 공부했다. 당시 상사로부터 '얼마나 독하게 공부했는지, 베테랑 직원보다 업무를 훨씬 더 잘 안다'는 칭찬도 들었다.

2001년 '역삼1동 지점장'으로 부임했을 때도 기억에 많이 남는다. 2년간 초임 지점장을 마치고 발령받은 곳이었는데, 이곳은 지점장의 무덤이라 불렸다. 강남대로에서 150미터 정도 안으로 들어와야 볼 수 있는 곳이라, 고객들의 눈에 잘 띄지 않았다. 당시 강남대로변 사무실의 임차보증금이 3.3㎡당 3600만원이었는데, 역삼1동 지점의 임차보증금은 3.3㎡당 600만원에 불과했다. 한마디로 도저히 장사를 할 수 없는 곳이었고, 숱하게 폐점 얘기가 나왔다.

그런 곳에 배치받자 '여자로서 지점장 한 번 했으면 많이 올라간 것이니 이제 슬슬 나가란 얘기인가'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오기가 생겼다. 이 정도도 뚫지 못하면 지금껏 고생해온 게 너무나 억울할 것 같았다.

가장 먼저 한 일은 지점 명칭 변경이었다. '역삼1동'이란 소(小) 행정구역을 지점 명칭으로 사용하다 보니 소형 점포라는 인상을 주고 있었다. 그래서 과감하게 '역삼중앙' 지점으로 바꿨다. 그리고 내가 먼저 밖으로 나가 발로 뛰었다. 직원들에겐 손님을 가리지 말라고 했다. 어느 날 지점 근처에 주차장을 소유하던 고객이 거액을 들고 지점을 찾아왔다. 매일 동전만 바꿔가던 분이었는데, 직원들의 친절한 태도에 감명받아 다른 은행에 갖고 있던 예금을 빼서 들고온 것이다. 누구에게나 친절하자는 내 말을 직원들이 잘 따라준 결과였다.

노력엔 성과가 따라온다. 부임 1년 만에 여수신 규모를 25%(250억원) 늘렸고, 영업이익은 5억원 증가했다. 덤으로 좋은 인연까지 얻었다. 당시 역삼중앙 지점은 성원제강그룹의 서원석 회장 소유 건물에 있었다. 폐점 얘기가 자주 나와 불안했던 차였는데 내가 부임한 뒤 폐점 얘기가 쏙 들어가자, 나를 '은인'으로까지 치켜세웠다. 내가 행장이 됐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곧바로 휴대폰 문자로 축하해준 분이 서 회장이었다.

은행장이 된 뒤 지친 몸으로 집에 들어서자 남편이 "밥은 먹었느냐"며 말을 건네왔다. 어쩌다 보니 밤 11시가 다 돼가는 시간이었는데 저녁을 거른 상태였다. "못 먹었어"라고 하자 남편이 "잠깐 쉬라"고 하더니 밥상을 내왔다. 결혼하고 나서 남편으로부터 처음 받는 밥상이었다. 서툴렀다. 하지만 지금껏 내가 먹어본 밥 중에 가장 맛있었다. 그렇게 남편에게 밥상을 받고 나자 문득 '이제 더 이상 유리천장은 없는 건가'란 생각이 들었다.

이제 앞으로 할 일은 후배들에게, 선배들에게, 그리고 가족에게 부끄럽지 않은 은행장이 되는 것이다. 수많은 장벽이 가로놓여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예전에 그래왔던 것처럼 정면돌파해 갈 것이다. 은행 문을 나서는 날엔 '잘했다'는 얘기를 반드시 듣고 싶다.

[권선주 행장은] 와인 마니아… 자녀가 중2 될 때까지 수학 직접 가르쳐

1956년 전북 전주 출신. 경기여고와 연세대를 나와 첫 직장으로 기업은행에 들어갔다. 동대문지점 행원으로 시작해 35년간 기업은행에서만 일했다. 1998년에 서울 방이역지점장으로 처음 지점장이 됐고, 역삼중앙지점장과 서초남지점장을 거쳤다. 이후 본점에서 소비자만족센터장, PB(프라이빗뱅킹)사업단 부단장, 외환지원센터장, 외환사업부장 등을 거쳤다. 2010년 1월 서울 중부지역본부장이 되면서 기업은행 최초 여성 본부장으로 이름을 올렸다. 본부장이 된 지 1년 만인 2011년 1월 조준희 전 기업은행장의 발탁으로 부행장에 올랐다. 이 역시 기업은행 최초였다. 부행장을 하면서 카드 사업과 리스크관리 업무를 맡았다. 그리고 지난 1월 여성 최초 은행장이 됐다.

온화한 성품이지만 일을 할 때는 꼼꼼하게 챙기는 스타일. 와인 마니아로 전문가급 지식을 자랑한다. 자녀가 중학교 2학년이 될 때까지 수학을 직접 가르칠 정도로 자녀 사랑도 각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