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집 전전하던 피란의 恨… 내 모든 曲에 녹아있지"

"피아노 공부하는 것도 좋지만 작곡과로 옮기는 게 어때?" "전 작곡에 소질이 없어요." "쓸데없이 뺄 생각 말고 내 말대로만 공부해."

1951년 이화여대 피아노과 2학년에 다니던 스무살 처녀 이영자의 진로는 스승과 함께 송년 모임에 가던 택시 안에서 바뀌었다. 당시 이대 교수였던 임원식(1919~2002)이 작곡에 재능을 보인 그에게 전과(轉科)를 권유한 것이다. 한국 여성작곡가회를 창설, 여성 작곡가 1세대로 활약한 원로 작곡가는 이렇게 탄생했다.

60년 넘는 그의 음악인생을 기록한 '불사조의 노래'(문학관 북스)가 나왔다. 대학입학 한 달 보름 만에 6·25가 터져, 혼자 이대 기숙사에서 나와 춘천, 홍천, 횡성까지 가족을 찾아 헤매던 석 달간의 기록이 아찔하다. 허름한 빈집을 전전하며, 찌그러진 냄비에 상추와 쑥갓대로 국을 끓여 연명하다 35㎏까지 체중이 줄었다. 이영자씨는 "그때 겪은 전쟁의 고통이 내 작품의 바탕이 됐다"고 말한다.

대학 3학년 때 첫 가곡 '동심'을 쓴 이씨는 국내에선 나운영에게 작곡을 배웠고, 1958년부터 파리 고등음악원에서 3년간 작곡과 음악이론을 배웠다. 귀국 후 이화여대 음대 교수로 후학을 길러냈고, 주(駐)프랑스 대사로 부임하는 남편 한우석씨를 따라 파리에 가서도 학업을 이어갔다. 1987년 파리 소르본대 음악학 박사과정에 입학, 작곡가 올리비에 메시앙으로 논문을 쓰고 학위를 받았다. 지금까지 발표한 작품은 가곡 100여곡을 포함, 교향곡, 협주곡 등 140여편이나 된다. 여든둘이던 작년에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촉을 받아 피아노협주곡 '나의 조국'을 초연했다. 이씨는 "올해도 김남조의 시(詩)를 가곡으로 옮기는 작업을 계속할 계획"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