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니어 에세이] 풍경(風磬)소리

“댕그렁~~ 댕그렁~~” 바람이 부는지 아파트 외벽에 매달아 놓은 풍경이 운다. 맑고 청아한 소리, 흘러가는 바람 속에 뿌려지는 소리들이, 내 가슴속에도 파고들어와 ‘네 속 내가 다 안다’는듯 가만 가만 작은 시름들을 녹여 낸다. 넘침도 모자람도 없다.

저 멀리 티베트에 간 적이 있다. 친구들 몇 명이서 길을 나섰는데 고산 지대 여행은 처음이라, 튼튼하다고 자부하면서도 혹시나 고산병이 걸리면 어쩌나 싶어 나름대로 주사도 맞고 약도 먹고 만반의 대비를 하고 갔다. 그러면서도 마음속으로는 '그까짓 고산병이 심하면 얼마나 심하랴' 싶어 사실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도착 다음날부터 고산병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잠시 불쾌한 기분이 들더니 급기야 현기증이 나고 머리가 깨질듯이 아파왔다. 세상만사가 다 귀찮아지고 자꾸 눈은 감겨오니 티베트의 <성호>로 불리우는 ‘암드록초 호수’는 실눈으로 버스 속에 앉아 잠깐 보고 다시 잠들었는데, 잠결에 들리는 풍경 소리에 마음이 더없이 평화로운 게 아닌가.

그 풍경 소리가 사실 들렸는지 안 들렸는지 그건 접어놓고 다시 호텔로 돌아와, 의사에게 치료를 받고 난 후에, 몸이 어느 정도 회복이 되자 풍경을 사러 길을 나섰다. 불교 국가이니 분명 괜찮은 풍경을 찾을 수 있을 거로 생각하고 관광하는 틈틈이 관광객을 상대로 한 쇼핑몰을 뒤지기 시작했다.

사실 우리나라에도 풍경이 없는 것은 아니다. 평소에 풍경 소리가 좋아, 바람결에 들을 요량으로 인사동에 나가 사긴 했었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웬만한 바람으로는 소리가 나지 않았다. 가끔 절에 가 보면 잔바람에도 ‘댕그렁~~ 댕그렁~~’ 소리가 잘도 나던데 내가 산 풍경은 센 바람이 불어야 소리가 나니, 풍경 소리 듣기도 어려웠지만, 어쩌다 들린다 해도 센바람 소리에 파묻혀 제맛이 나지 않았다.

마음먹고 풍경을 사자 했는데 어쩐 일인지 가는 곳마다 풍경을 발견하지 못하고 돌아오는 날을 맞았다. 짐을 주섬주섬 싸서 호텔 로비에 옮겨놓고, 그래도 미련이 남아 혹시나 하고 호텔 옆 쇼핑몰에 갔더니 등잔 밑이 어둡다고 거기에 있는 게 아닌가. 얼마나 반가웠는지 깎자 소리도 한마디 못하고 덥석 사고 말았다.

지금도 생각해 보면 분명 바가지 썼겠지만 그럼 어떠랴. 달 때가 없어 비록 아파트 외벽에 달아 놓았지만 오늘같이 바람 부는 날이면 지금처럼 저렇게 ‘댕그렁~~ 댕그렁~~’ 소리를 내니 이보다 더 좋을 수 있겠는가 말이다.

집에 간혹 놀러오는 이들이 아파트 외벽에 매달려있는 풍경을 어쩌다 발견하면 까르르 웃곤 한다. ‘아파트에 생뚱맞게 풍경이라니… ’ 속내가 다 드러나게 웃는다. 하긴 내가 생각해도 생뚱맞기는 하다. 풍경이라면 산속 절에 그것도 대웅전 처마 끝에 매달려 있다가, 남이 다 잠이 든 밤에 홀로 깨어, 잠들지 못하는 이를 위해서 파문이 일어야 제격이라는 걸 모르는 바 아니지만 그래도 좋다.

아파트 외벽에 매달려 내는 풍경 소리라도 가만히 듣고 있으면 마음이 평온 해 진다. 나도 모르게 마음 속 욕심들을 한 가지씩 한 가지씩 내려놓고 풍경소리를 따라 나서면 내 마음속에서도 ‘댕그렁~~ 댕그렁~~’ 풍경 소리가 나고, 잊고 있었던 풀벌레 소리가 들리고 눈부시게 빛나는 달빛을 만나고 별빛을 만나니 스르르 마음의 문이 열리고 세월의 강을 따라 흘러가며 부처의 깨달음 한 음절이나 하느님의 한 말씀이 저절로 가슴에 들어와 유연하게 자리를 잡아도 전혀 어색하지 않으니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는가?

바람이 만들어 내는 풍경 소리. 보이지 않는 바람을 눈으로 보지 않고 귀로 본다. 보이지 않는 바람을 귀로 보면서 겉으로만 화려하게 치장하고 나서는 사람들을 보며 나를 보며 가끔은 이렇게 풍경소리 들으면서 나의 내면을 들여다 본다. 내 마음에서부터 아름다운 풍경 소리가 세상을 향해 퍼져나가게 마음을 가꾸는 일. 그게 지금 우리 시니어들이 해야 하는 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