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왕마마 납시오"

‘나 어때요? 오른쪽 발이 금이 가 쉬고 있어요. 20여 일을 남편 밥 얻어 먹어가며 잘 쉬고 있어요.’ ‘큰 바위 얼굴’ 선배로부터 느닷없는 문자가 왔다. 사진도 첨부했나 본데 보이질 않는다. 아마도 목발을 짚고 있는 모습일 듯 했다. ‘아니 어쩌다가!’ 늘 장문의 이메일을 주고받는 사이인지라 선배는 문자로 못다 한 얘기를 메일로 이어 보냈다. ‘여왕 마마 납시오~’란 제목으로….
 
여왕과 시종

내 생에서 가장 긴 휴식을 하고 있어요. 우리 친구 말로는 안식년이라고 하네요. 69년 만의 휴식. 밥도 남편이 해주고, 집 안 청소며 빨래까지 다요. 그런데 일하는 남편을 보고 있으니 미안하고 안쓰러워서 “나는 ‘공주과’가 못 되는 모양이에요. 받고만 있으니 미안하네요.” 그랬더니, “당신은 여왕이지. 난 시종이고” 하면서 웃기는 거예요. 남편이 슬슬 피곤한지 지치는 것 같아요. 여자들 일이 잔잔하게 얼마나 사람을 지치게 하는지 알 거예요. 내가 해버리면 빠를 것을 보고만 있자니 답답해요. 그래도 남편에게 감사할 뿐입니다.
 
일흔의 연세에도 여전히 바깥 활동을 하는 선배다. 마침 차를 갖고 나가지 않은 날, 급경사 길을 오르다가 그만 오른쪽 발목을 삐거덕하고 말았다고 한다. 일전에 한 건강 관련 TV 프로그램에서 ‘나이 들어가며 가장 중요한 것은 ○○○○ 이다’ 란 퀴즈를 냈기에 ○○○○가 무얼까 궁금증을 불러일으켰었다. 그 답은 다름 아닌 ‘균형감각’이었다. 선배가 바로 그 감각을 순간 잃으셨구나, 얼른 내 답 글이 날아갔다.
 
변함없는 사랑
 
아이구, 우째 그런 일이! 목발까지 짚고 다니게 되신 줄은!! 금이 갈 정도였던 것만도 다행이라고 위안 드릴 밖에요. 저의 시어머니는 작년 이맘때 발목이 완전히 부러져서 입원만도 한 달을 넘게 하시는 바람에 다들 몹시 힘들어했던 기억이 새롭네요. 저도 작년 봄 거의 목발 근처까지 갔었고요. 그러니 얼마나 여러 가지 힘드실까, 정말 느껴집니다.
 
밖으로 나와 있는 신체 가운데 다리에 문제가 생겨 이동이 어려워지는 것만큼 나이 들어 서글픈 게 없겠다는 걸 절감했었거든요. 그런 가운데서도 휴식이라 여기시니, 아니 무엇보다도 '여왕 마마 납시오~' 하시니 너무 멋있으세요! 시종님이 실은 더 멋지시네요. 아니, 도대체 두 분께서는 '사건'이 일어났는데도 멋지시기에요? 그래도 되시는 건감요?? 마마, 옥체를 보존하소서!

거동이 불편한 게 문제지 쉴 자격이 차고도 넘치는 선배다. 70년을 쉬지 않고 달려왔으니 한두 달 쉬신 들 어떠랴. ‘시종’의 극진한 시중을 받으면서. 지금 시종을 자처하고 계신 여왕 마마의 부군은 몇 번 뵌 적이 있다. 대학교수를 정년퇴임하고 여든을 바라보는 연세지만 아직도 연구 분야에서는 물론이고 테니스 코트에서도 펄펄 나신다. 서울 인근에 마련한 시골집에서 주말이면 밭일에도 열심이시다. 무엇보다 존경스럽고 또 부럽기도 한 점은 여왕 마마에 대한 변함없는 사랑이다. 외부에서 선배에게 걸어온 전화 속에서나, 집을 나서는 현관에서나 흘깃 듣게 된 그분의 맺음말은 언제나 “여보, 사랑해요.”였다.

웬수

그냥 ‘립 서비스’에서 나오는 ‘닭살’이 아니란 점이 중요하다. 오래 곰삭은 장맛인 양 자연스럽고도 은근한 정감이 담뿍 느껴졌다. 말로만이 아닌 분이다. 어디를 다녀오든지 반드시 선배가 좋아하는 선물을 챙겨 오시는 걸 본다. 비싸지 않고 작은 것일지라도 아내의 취향을 꿰뚫고 있는 품목들이었다. 선배와는 오랜 세월 허물없이 사적인 얘기까지 털어놓으며 지내다 보니 절로 알게 된 사실들이다. 서로 다르게 살아온 사람 둘이 함께 사는데 때로 언짢은 적이 왜 없었을까. 그럼에도 내가 본 이들 가운데 가장 아름답게 사는 듯한 부부시다.
 
“여보, 사랑해요”에 대한 선배의 화답은 언제나 “나두요.” ‘찹쌀떡 사려!’를 외치고 다니는 장수를 뒤따라가며 숫기 없는 초보 장수가 복창했다는 게 ‘나두요’ 아니던가. 그러니 선배도 그저 추임새인 수준에서 좀 넘어서면 어떻겠냐 했더니, “우린 그냥 그래요”가 답이다.
 
10여 년이나 아래, 아마도 남편 쪽으로 치면 20여 년은 더 젊은데도 선배 부부의 흉내조차 내지 못하고 살면서 말로는 한술 더 뜨려는 후배가 아닐 수 없다. 선배네에겐 일상의 단어건만 우리 집에선 결혼 전후 열애 시절 잠시 활개를 친 후 어디로 숨어버렸나? 원고지 1백 장에 사랑을 고백하던 남자는 어디로 사라져버렸나?
 
‘부부 내공’
 
사실 ‘웬수’만 되지 않고 사는 것만도 다행인 부부들이 좀 많은가. 흔히들 말하기를 부부는 20대엔 신나서 살다가 30대엔 서로가 한눈 팔며 살고, 40대에는 마지못해 산다고 한다. 50대가 되면 서로가 가엾어서 살고, 60대엔 서로가 필요해서 산다나. 70대에 이르면 서로가 고마워서 산다니, 그래서 늙으면 부부밖에 없다고들 말하나 보다.
 
선배도 늙어가는 남편이 안쓰러울 때가 많다는 얘기를 종종 하는 걸 보면, 서로가 고마워서 사는 ‘부부 내공’의 경지에 이른 게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아직 웬수 부부는 40대여서 그런 건가? 실제 나잇대가 그렇든지, 나이는 더 먹었을지라도 부부 내공의 수준이 40대에 머물고 있든지 간에. 
 
세상에서 가장 로맨틱한 말은 프랑스어 ‘아무르’, 세상에서 가장 로맨틱한 단어 역시 ‘사랑’이라고 한다. 하지만 표현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누가 그 표현을 ‘낯간지럽다’ 할 손가. 표현 속에서 사는 선배는 진짜 여왕 부럽지 않아 보인다. ‘사랑이 없으면 왕과 여왕의 영화도 부질없습니다. 진실한 사랑은 그 주인공들의 삶을 기쁨의 멜로디로 채우고 평범한 사람도 왕과 여왕으로 만듭니다.’ 바로 어제 지인이 보내온 글 가운데 한 토막 그대로니까 말이다. 선배를 부러워만 말고 올해는 나도 여왕 좀 되어 볼까나. 그러려면 ‘원수를 사랑하라’는 성경 말씀부터 실천해야 하니, 그것이 문제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