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니어 에세이] 초보 농사꾼이 그린, 벼농사 5년의 희비쌍곡선

논 댓 마지기에 벼농사를 지은 지 꼭 다섯 해가 되었다. 그땐 처음 시작하는 일이라 두렵기까지 했지만, 마침 친구의 논이 근처에 있어 은근히 조력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무작정 시작하였다. 심고 거두는 것은 기계의 힘을 빌려야 하기 때문에 전업 농사꾼에게 맡기기로 하고, 비료, 제초제 주기, 피사리를 비롯한 잡초 제거, 논두렁 깎기, 물대기 등이 내가 하여야 할 일이다.

마침 길가에 논이 있어, 고향의 지나가는 사람들이 모두 농사 선생님이 되어주었다. 한 해 농사지은 것이 다음 해 농사의 길잡이가 되겠기에 꼼꼼히 영농일기를 적어 나갔다. 쌀 미(米)자를 팔십팔(八十八)로 파자하여 보면, 벼농사에는 88번만큼이나 많은 손이 가야 한다고 하고, ‘벼는 농부 발자국 소리를 듣고 자란다’ 하는 소리로 보아, 많이 논을 찾아야 한다는 말로 들린다. 그러나 농사의 성패는 사람의 기술과 노력보다 하늘이 내려주시는 날씨에 더 영향을 많이 받는다는 것을 실감케도 되었다. 적기에 물대기를 잘해야 한다는 것과 물의 양을 잘 조절하여야 하고, 비료나 제초제 준 후에는 물이 적당량 고여 있도록 해 주어야 한다는 것, 모심기 때부터 살충 살균을 잘하고, 제초제를 잘 주어 잡풀들이 나지 않도록 하며, 수시로 살펴 잡풀들을 제거해주어야 한다는 것도 알았다.

첫해의 실수담을 적어 보면, 다른 논과 달리 굴곡(Wave)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다른 곳에선 웨이브가 멋질 수도 있지만 논에는 웨이브가 그려져선 안 되는 것이다. 비료를 줄 때, 골고루 퍼지게 주지 못하고, 많이 준 곳은 웃자라게 되고, 적게 준 곳은 성장이 느려져, 비료 살포의 과다에 따라 높고 낮은 굴곡이 만들어진 것이다. 역시 지나가는 사람들의 조언이 쏟아졌다. 손목의 스냅을 잘 이용하고 그물 치듯 넓게 퍼지게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양한 색깔(Color)이 만들어졌다. 성장하면서 골고루 논 전체가 일정한 색깔이어야 하는데, 짙은 녹색, 중간 녹색, 노란 색깔 등으로 형형색색 구분되어 버렸다. 역시 비료가 많이 떨어지고 적게 떨어짐에 따라 벼의 색깔이 다양하게 된 것이다. 남들이 비료 줄 때는 그냥 손을 휘저어 나가는 것 같이 쉽게 보였는데 그 조절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님을 알았다. 또 미쳐 손을 못 댄 곳이 있어, 빈 공간(Space)이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기계도 완전하지 못한지라 빈자리는 꼭 모짓기(빈 곳에 모를 심는 일)를 하여야 하는데 그것을 하지 못해 여기저기 구멍을 내놓고 말았다. 어느 곳은 길게, 어느 곳은 둥글게 무늬가 생겼다.

한 가지 잊으면 안 될 것은 제때 시기를 놓치면 그 후에는 아주 복구할 수 없거나, 해도 결과는 반의 성공밖에 이루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벼농사에도, 교육학에서 이야기하는 '불가역(不可逆)의 법칙'이 적용되는 것 같다. 즉 그 시기에 습득하여야 할 것을 습득치 않으면 다음 시기에는 습득할 수 없다는 뜻인데, 벼농사도 어쩌면 사람을 기르는 것과 같은 원리 속에 이루어지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논두렁 풀을 깎다 보면 뉘엿뉘엿 해가 넘어가고 어둑어둑해진다. 잠깐 앉아 쉴 량이면 온갖 생각들이 엄습해 온다. 남이 지은 쌀로 밥을 먹다가 내 손으로 농사지어 먹는다고 생각하니 흐뭇한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 역시 농사는 힘든 것이구나 하는 것을 느껴본다. 문득 눈에 들어오는 황홀한 저녁노을이 피로한 심신을 한껏 위로해 준다. 초보 농사꾼의 농사가 어찌어찌 한 순배 돌아 수확 때가 되면, 수확량은 어쨌든 해냈다는 성취감에 뿌듯해진다. 봄 가고, 여름 가고, 가을이 와서, 벼가 노랗게 알알이 익어 고개가 숙여지게 되면, 자긍심과 함께, 흐뭇한 미소가 절로 띠어진다.

5년간의 작업 일지를 월별, 날짜별로 맞춰 도표로 만들어보니, 한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다. 우선 모내기는 5월 25일경 하고, 벼 베기는 10월 10일경 하게 되어, 모내기부터 벼 베기까지 대략 5개월에 걸쳐 140여 일의 시간이 소요된 것이다. 그리고 첫 거름과 이삭거름 살포, 제초제 주는 시기도 대략 5일 내외로 주게 된다. 논두렁 풀 깎기, 피사리를 비롯한 잡초 제거도 때를 맞춰 하여야 한다. 제일 마음이 상하는 것은 태풍의 피해다. 벼가 패어 풍매(風媒)가 이루어져야 할 때 바람이 세게 불게 되면 꽃가루가 떨어져 이삭을 맺지 못하게 되고, 또 쓰러지게 되면 큰 손실을 입게 된다. 한 해는 고라니가 침입하여 꽤 많은 벼를 짓밟아 놓기도 하였다. 비가 많이 오거나 바람이 불게 되면 밤잠까지 설치게 된다.

어릴 때, 시골에서 농사지으시던 할머니께서, 비 오는 날, 뜰팡 끝에 앉아 농사 걱정 푸념을 늘어놓으시던 모습이 떠오른다. ‘물고를 본다’는 말은 농사짓기 전부터 많이 들어본 말이지만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물이 들어오는 곳과 나가는 곳의 수위를 조절하거나 관의 크기를 조절하여 때에 맞춰 논에 요구되는 물의 양을 맞추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물고를 볼 줄 알면, 농사꾼 다 된 것이다’란 말이 실감난다.

전보다 더욱 농사짓는 분들의 노고를 알게 되고, 하나의 쌀톨도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란 사실을 더욱 절감하게 되었다. 옛 어른들이 밥알 하나라도 구정물 속에 흘려보내지 아니하고 소중하게 여기셨던 사실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아무리 귀여운 손주라도 밥을 흘리며 먹거나 지저분하게 남기면 야단치셨던 기억이 난다.

봄 되면 6년 차의 벼농사가 시작된다. 이제까지의 영농을 밑거름 삼아 또 한 해의 농사를 지어보아야지. 더 나은 영농의 한 해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