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행이 빠르게 지난 자리… 그 뒤에 남는 건 '클래식'

1990년대 서울 한강 이남에서 학교를 다닌 10대들은 파란색과 빨간색, 그리고 하얀색이 들어간 직사각형 로고를 찾아 헤맸다. 이 로고를 단 폴로 셔츠와 치노 팬츠, 바람막이는 미국 사립학교 학생들의 교복처럼 단아했지만, 운동선수들의 유니폼처럼 경쾌하기도 했다. 말 탄 남자(랄프로렌 폴로)나 요트(노티카) 로고가 새겨진 옷과는 달리 한국에 정식 매장이 없어서 더 귀했다. 그때 타미힐피거는 성적도 우수하면서 축구와 노래도 잘하는 '학생회장 오빠' 같았다.

23일 서울 신사동의 타미힐피거 플래그십 스토어(flagship store·브랜드를 대표하는 전략 매장)에서 만난 프레드 게링 타미힐피거 CEO에게 90년대 한국 10대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자 그는 양팔을 뻗어 매장 안을 가리켰다. '이제 더 이상 찾아 헤맬 필요가 없다'는 제스처였다. 게링 CEO와 대니얼 그리더 차기 CEO는 17일 문을 연 이 매장을 둘러보려고 한국에 왔다. 한국에 있는 타미힐피거 매장은 232개. 아시아에서 가장 많다.

그리더 차기 CEO는 "한국 남자들의 옷을 유심히 살펴봤는데, 갖춰 입은(dress up) 젊은이들이 많아서 아주 흡족했다"며 "그들이 바로 한국 시장의 잠재력"이라고 했다. 그리더 역시 파란색 넥타이에 파란색 땡땡이 포켓치프(양복 가슴주머니에 꽂는 손수건)까지 곁들인 타미힐피거 슈트를 빼입고 있었다. "저희는 전통(classic)을 받아들이면서도 격식에 얽매이지 않고, 긍정적이며 활동적인 사람들이 좋아요. 전위적이거나 우울한 것과는 거리를 둡니다."

이날 게링 CEO는 폴로 셔츠에 재킷을 걸치고 있었다. 그에게 "타미힐피거에서 단 하나의 옷만 가질 수 있다면 무엇을 고르겠냐"고 물었다. 그는 주저없이 재킷을 열어젖히더니 검은색 폴로 셔츠의 가슴팍에 새겨진 타미힐피거의 로고를 보여줬다. "당연히 폴로 셔츠죠. 저한테는 100벌이 넘는, 다른 색상의 폴로 셔츠가 있어요. 청바지에도, 면바지에도, 슈트에도 입어요. 타미힐피거의 클래식인 이 옷이 더 이상 안 팔리면 타미힐피거도 더 이상 사랑받지 않는다는 걸 의미합니다."

맥도날드 햄버거가 만들어지는 속도보다 더 빨리 유행이 바뀌는 세상에서 이들이 이야기하는 '클래식'이란 언제까지 유효할까. 신사동의 타미힐피거 플래그십 스토어만 해도 '패스트 패션'(저렴하고 소비 주기가 짧은 옷)을 양산하는 SPA 브랜드로 둘러싸여 있다. 게링 CEO는 "타미힐피거도 유행을 받아들인다. 다만 유행을 우리 식으로 비틀어 해석할 뿐이다. 때론 타미힐피거의 정체성과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유행도 있다. 그럴 땐 그냥 흘려보낸다"고 했다. "유행을 빨리 받아들이는 패스트 패션 산업이 매우 번창한다는 것을 잘 압니다. 하지만 유행이 빠르다는 것은 타미힐피거에 결코 나쁜 게 아니에요. 그건 말 그대로 빨리 지나간다는 것이죠. 결국 남는 건 어느 쪽이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