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4.01.29 09:56

Trend

세상에 존재하는 사물은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사라지는 것과 사라지지 않는 것. 다른 사물이 대체하면서 효용 가치가 떨어져 옛 물건으로 남는 것이 있는 반면 시간의 흐름 속에 영속되는 사물이 존재한다. LP가 바로 그러하다. 이즈음, 많은 이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났던 LP가 다시 제 목소리를 내며 사람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고 있다.

LP는 1948년 첫 선을 보였고, 당시만 해도 소수 계층이 향유할 수 있는 문화였다. LP 한 장 가격이 상당한 고가였기에 주급을 받아 살아가는 노동자들이 사서 즐기기는 어려웠던 것. 이후 진화를 거듭해 1960년대 음반 녹음과 제작 기술은 정점에 달했다. 명반으로 꼽히는 많은 음반이 이때 제작되었고, 당시의 음반은 요즘에도 비싼 가격에 거래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LP가 유행한 때는 1960~1980년대로, 1990년대 들어 전 세계적으로 CD가 대중화되면서 국내 LP 시장도 사양길로 접어들었다. 깨끗한 음질과 콤팩트한 사이즈의 CD는 사람들을 현혹시키기에 충분했고, 음악계의 혁명처럼 여겨졌다. 그런데 그로부터 20여년이 지난 지금, 다시 LP가 주목을 끌고 있다. 무슨 까닭일까.

“LP를 듣는 이유는 하나다. 소리가 좋기 때문이다. 아날로그 방식으로 제작한 LP는 라이브 음악과 다를 바 없이 음악 그 자체다. 그러나 디지털 음원은 본래 음악보다 디테일이 떨어지고 기계음이 많다. 같은 곡을 LP와 디지털 음원으로 각각 들어보면 확연한 차이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녹음이 잘된 명반을 들으면 이게 과연 내가 알던 그 음악인가 싶을 정도로 좋다”라고 LP 바 ‘게스후’의 김형신 대표는 말한다.

“LP음반의 소리골을 가느다란 바늘이 접촉하고 지나가면서 시공을 초월한 원작자의 숨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재생될 때, 그 소리의 질감은 직접 체험하지 않고는 말할 수 없는 감동이다.”

LP는 녹음에서 재생까지 모두 아날로그 매체를 사용하기 때문에 들을 때 편안한 느낌을 준다. 하지만 아날로그 음이 디지털로 변환될 경우 정보가 많이 손실된다. CD는 특정 주파수 대역만 선별해서 재생하고, 여기에서 더 변형된 MP3파일은 용량 자체가 작아서 CD보다 훨씬 많은 부분을 삭제하고 이어 맞춘 형식이기 때문에 본래의 음질과는 달리 부자연스럽게 들릴 수 있다.

그러나 디지털 음원은 여전히 건재하다. 디지털 기기는 편의성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구미에 잘 맞았고, 새로운 방식으로 옮겨가는 것에 별다른 저항감이 없었기에 우리의 생활 속에 파고들어 안착했다. 지금 음악 시장을 선도하는 것은 디지털이다. 스마트폰 이용자가 급격히 늘어나면서 요즘에는 음악을 듣는 수단이 CD도 아니고 아예 디지털 파일로 완전히 넘어가고 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LP 이용자도 이에 발 맞춰 큰 폭으로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미국의 음악소비량을 측정하는 닐슨 사운드스캔에 따르면 2011년 미국 내 디지털 음악 소비량이 CD와 LP 등 실물 음악 소비량을 사상 처음으로 넘어섰다고 발표했다. 2011년 미국에서 MP3 다운로드와 스트리밍 등 디지털 음악 소비량은 전체 시장의 50.3%를 차지해 처음으로 실물음악 소비량보다 많았다. 흥미로운 결과는 2011년 LP 판매량도 지난해보다 36% 급성장 했다는 것이다. CD 판매량이 전년대비 5.7% 줄어든 것과 대조적이다. 비록 전체 LP 판매량은 디지털사운드 양에 비해 적은 수준이지만 음악업계는 앞으로 실물 형태의 음악 매체 중 CD는 사라지고 LP만 유일하게 살아남을 것으로 전망한다.

LP가 시장에서 살아남는 경쟁력의 주축은 앞서 말했듯 자연의 소리를 담아낸 음질에 있다. 40대 이후 중장년층 뿐만 아니라 젊은층의 LP 마니아가 늘어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레코드를 구매하러 오는 고객 중에는 20~30대도 적지 않다. LP를 경험하지 못한 세대임에도 그 소리에 빠지는 것은 기존의 디지털 음악과는 다른 음악의 질을 느꼈기 때문이다. 어쩌면 요즘이 LP를 즐기기엔 더 좋은 때다. 예전에 우리나라에 들어온 음반은 복사본 같은 저가 제품이 많고 고작해야 미군부대에서 나온 것이 대부분이어서 당시 최고의 음반을 즐길 기회는 좀처럼 없었다. 여행자유화 이후에야 해외로 좋은 음반을 구하러 갈 수 있었다”라고 ‘필레코드’ 김원식 대표는 말한다. 깨끗한 음질과 편리함으로 대중화를 이룬 디지털 음악과 완전한 음악성으로 변치 않는 사랑을 받고 있는 아날로그 음악. 선택은 각자의 몫이다.


LP Q&A

Q. LP란 무엇인가?

LP(Long Playing) 이전에 등장한 SP(standard Playing)는 음반 한 장에 3~5분 정도 길이의 음악만 담을 수 있었다. 음향 기술, 프레스 기술 등이 발전하면서 한층 진보된 레코드가 바로 LP이다. LP라는 명칭에서 알 수 있듯 무엇보다 재생 시간이 길어졌다는 것이 특징. 노래 10곡을 들으려면 최소 5장의 SP가 필요했지만, 한 면에 30분 분량이 수록 가능한 LP 덕분에 단 1장에 그 노래들을 모두 담을 수 있었다.

Q. LP의 등장은 음악사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연주 시간이 비교적 긴 클래식 음악을 대중화하는 데 핵심적 역할을 했다. 공연 무대는 시간적, 공간적 제약이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향유할 수 없었다. 그러나 SP라는 음반 포맷의 한계로 인해서 음반으로 보급되지 못했던 교향곡과 오페라 등이 LP로 제작됨으로써, 많은 사람들이 뛰어난 연주자나 오케스트라의 음악을 언제 어디서나 들을 수 있게 되었다.

Q. LP로의 회귀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사람들이 LP를 선호하는 첫 번째 이유는 아날로그 방식으로 제작해 자연에 가까운 소리를 내기 때문이다. 이 외에 디지털 음원과 달리 손으로 만지고 감상할 수 있는 예술적인 앨범 재킷도 한몫한다. 사진, 그림, 일러스트, 그래픽 등을 활용한 재킷 디자인은 예술 작품에 비견될 만하다. 실제로 앤디 워홀을 비롯한 유명 작가들이 음반 재킷 작업에 참여해 참신하고 독창적인 커버를 선보였다.


LP Music Bar

| 게스후 |

게스후
©게스후
음반점과 LP 바가 함께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90평에 달하는 바에는 다양한 LP가 천장까지 빽빽하게 들어차 있어 LP 애호가의 마음을 설레게 할 듯. 또한 고가의 JBL 파라곤 스피커로 본인이 찾은 LP를 직접 들어볼 수도 있다. “JBL 파라곤 스피커 혼(Horn)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은 뮤지션이 라이브로 연주하는 듯한 감동을 느끼게 해준다”며 아날로그의 매력을 설파하는 김형신 대표는 음악에 빠져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음악계에 투신한 인물. 1998년부터 LP를 다뤄 왔으며 클래식, 샹송, 재즈, 메탈 등 장르를 불문하고 음악적 조예가 깊은 사람으로 유명하다. 다량의 음반을 보유하고, 뛰어난 오디오 기기를 통해 음악을 감상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선곡한 클래식과 재즈를 김 대표의 설명과 함께 들을 수 있다는 것이 이곳의 장점이다.

문의 02-547-9063


| 뮤즈온 |

뮤즈온
©월간 <오디오>
용산 전자랜드에 위치한 음반 숍 ‘필레코드’의 김원식 대표가 운영하는 곳이다. 김 대표는 20여 년 동안 한 해도 거르지 않고, 1년에도 여러 차례 영국에 가서 LP를 구입해 오는 만큼 희귀본도 다량 보유하고 있다. 그중 하나가 롤링스톤스의 ‘스티키 핑거스’ 앨범. 남성 청바지에 실제로 개폐가 가능한 지퍼를 달아놓아 화제를 모은 앨범 커버는 미국의 팝 아티스트 앤디 워홀이 디자인 했다. 대화를 나누면서 편안하게 음악을 음미할 수 있는 공간을 지향하는 뮤즈온은 신사점과 목동점 두 곳. 신사동 가로수길에 위치한 뮤즈온은 젊은이들의 거리인 만큼 20~30대가 많이 찾는 편이다. 반면 목동에 위치한 뮤즈온은 주변의 방송국과 회사에 근무하는 직장인과 아파트에 사는 중장년층이 주고객이다. 목동점의 경우 고객의 취향을 고려해 주로 60~70년대 록과 올드팝, 샹송, 칸소네 같은 음악을 들려준다고.

문의 02-514-4541(신사점), 02-711-4541(목동점)


| 제플린 |

‘소리의 질’을 운영 철학으로 내세우는 만큼 최적의 음향 시스템을 자랑한다. 무엇보다 시선을 끄는 공간적 매력은 LP 바 한쪽 벽면을 차지하고 있는 프로젝터 영상. 운영 시간 내내 뮤직비디오와 공연실황 등 블루레이 DVD를 상영한다. 강남구 논현동.

문의 02-532-9727


| 브라스 |

홍대 근처에 자리한 브라스는 신문사와 잡지사 기자 출신이 운영하는 곳으로 대표의 해박한 음악 지식을 들으며 감상할 수 있다는 것이 장점. 빔 스크린으로 상시 상영하는 고전 영화도 바의 운치를 더해준다.

문의 02-338-8342


| 오아시스 |

신천역 부근에 위치한 오아시스는 국내외 뮤지션들의 다양한 음반을 갖추고 있으며, 인테리어도 ‘아날로그적인 감성’을 물씬 풍긴다. 브라운관 TV, 녹음기, 다이얼 전화기 같은 추억의 물건을 비롯해 앤틱 가구와 해외여행 중 사 모은 아기자기한 소품들이 애잔한 추억을 선사한다.

문의 02-420-6274


| 피터 폴 앤 메리 |

1960년대 미국 포크 그룹 이름을 딴 피터 폴 앤 메리의 상징은 3m가 넘는 대형 스피커. 미국 최고의 스피커 브랜드 웨스턴 일렉트로닉의 첫 모델로 1930년대 극장에서 사용하던 수제품이다. 이 소리를 들어보려고 애호가들이 지방에서도 찾아올 정도라고. 강남구 신사동.

문의 02-547-2838


“진짜 음악은 보편적 공감을 이끌어낸다”

날이 추워지면 아버지는 집에서 음악을 듣곤 하셨다. 오디오를 사달라고 졸랐던 것은 정작 나였지만 아버지가 오디오를 만지는 날은 먼발치에서 부럽게 바라볼 뿐 다가가지 못했다. 그즈음 나의 일상은 음악이었고, 음악이 곧 전부였다. 금단현상은 조바심이 됐고 그런 날은 종일 아버지가 출타하시기만을 간절히 바랐다.

30년 전 그렇게 나는 오디오에 입문했다. 이후 음악을 듣는 환경은 급격하게 변했다. CD가 보급되면서 LP의 운명은 크고 작은 숍들이 연이어 문을 닫으면서 심각한 현상으로 받아들여졌다. 집안 구석에 처박혀있던 음반은 고물상이 매입했고, 후미진 도시에서 초라한 자취를 드러냈다. 영락없는 폐기물이었다. 사람들은 그때 LP가 흔적조차 남지 않고 영원히 사라질 것이라고 웅성거렸다. 웅성거림이 그 몰락의 예견으로 당연시되고 신뢰할 수밖에 없는 숱한 증거들이 등장했는데, 2000년대가 되면서 대한민국에서 마지막으로 LP를 생산하던 공장이 사라진다는 기사를 읽었을 때가 그 절정이었다. 나는 잠깐이긴 했지만 갖고 있던 LP를 처분할 것을 고민하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용기가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다행이 없다.

다시 LP를 찾는 사람들의 논리는 단순했다. 시대를 대표하고 음악적 성취가 탁월했던 당대의 음반들은 디지털이 없을 때 만들어졌던 시대의 소리를 담고 있다. 디지털 방식을 염두에 두지 않고 만들었던 음악을 디지털로 들어서는 제 맛을 느낄 수 없다. 원 음악을 만들던 방식 그대로 듣는 것이야말로 그 곡을 만든 사람들의 느낌을 제대로 재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비틀즈의 ‘Abby Road’나 롤링 스톤스의 ‘Sticky Fingers’가 빅 히트를 했던 시기에 디지털 음원이란 단어는 없었다. 80년대를 가로 질러 시대를 풍미했던 들국화, 김현식, 유재하, 김광석의 음악도 모두 아날로그 방식으로 만들어진 음악이다.

편리한 디지털 녹음 방식보다 다시 아날로그 방식을 고집하는 유명 뮤지션들이 생겨나 팬심을 자극했고, 그들을 따르는 많은 무리의 팬들은 앞 다퉈 아날로그를 선택하기 시작했다. 창고에서 숨을 죽이던 헌 LP들의 먼지를 털어냈고, 기념비적인 음반들이 새로 제작되어 선보이기 시작했다. 문을 닫았던 LP 공장도 다시 돌아간다고 한다. 이에 발맞춰 턴테이블 회사들도 속속 저렴한 신제품을 만들고 있다. CD와 다른 아날로그의 소리를 찾으려는 반격이 시작된 것이다.

LP의 부활을 그저 ‘추억 팔이’라고 폄하하는 사람도 있다. 돌아갈 수 없는 시대에 대한 향수가 깃들어 있으니 온전히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그뿐이겠는가. LP의 매력은 그것을 경험하지 않았던 많은 사람들에게 더 새로운 것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그들은 디지털 음원과 LP의 차이를 실감하면서 아날로그에 입문하기 시작한 세대다. 아날로그 음악의 부활을 만들어 준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디지털 음원이었던 것이다.

차이를 넘어 이전에 듣지 못했던 진지한 소리에 대한 탐구를 담았던 LP시절의 명반들은 요새 음악을 통해 범접하기 힘든 깊이를 느끼기도 한다. 어디서나 쉽게 접할 수 없는 깊고 풍부하게 우러나오는 감동의 세계는 음악이 얼마나 위대한 예술인가 보여준다.

직장을 다니며 돈벌이를 시작하고 오디오를 장만하면서 음악의 취향도 세월과 함께 바뀌었다. 좋았던 것이 싫어지기도 했고, 무관심했던 것에 대해 호기심이 생기기도 했다. 근래에 아버지 시대에 유행했던 음반 몇 장을 어렵사리 구해 들었다. 식민지와 전쟁을 겪었던 어른들의 음악이다. 다음 주말에는 아버지께 그 음반들을 들려드리련다. 이제는 함께 음악을 들을 수 있을 것 같다.


글쓴이 김영훈은 〈생각의나무〉, 〈오픈하우스〉 편집주간을 지냈다. 문학과 예술 분야의 책을 기획·출판해왔으며, 현재는 출판사 안나푸르나의 대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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