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존재하는 사물은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사라지는 것과 사라지지 않는 것. 다른 사물이 대체하면서 효용 가치가 떨어져 옛 물건으로 남는 것이 있는 반면 시간의 흐름 속에 영속되는 사물이 존재한다. LP가 바로 그러하다. 이즈음, 많은 이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났던 LP가 다시 제 목소리를 내며 사람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고 있다.
LP는 1948년 첫 선을 보였고, 당시만 해도 소수 계층이 향유할 수 있는 문화였다. LP 한 장 가격이 상당한 고가였기에 주급을 받아 살아가는 노동자들이 사서 즐기기는 어려웠던 것. 이후 진화를 거듭해 1960년대 음반 녹음과 제작 기술은 정점에 달했다. 명반으로 꼽히는 많은 음반이 이때 제작되었고, 당시의 음반은 요즘에도 비싼 가격에 거래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LP가 유행한 때는 1960~1980년대로, 1990년대 들어 전 세계적으로 CD가 대중화되면서 국내 LP 시장도 사양길로 접어들었다. 깨끗한 음질과 콤팩트한 사이즈의 CD는 사람들을 현혹시키기에 충분했고, 음악계의 혁명처럼 여겨졌다. 그런데 그로부터 20여년이 지난 지금, 다시 LP가 주목을 끌고 있다. 무슨 까닭일까.
Q. LP란 무엇인가?
LP(Long Playing) 이전에 등장한 SP(standard Playing)는 음반 한 장에 3~5분 정도 길이의 음악만 담을 수 있었다. 음향 기술, 프레스 기술 등이 발전하면서 한층 진보된 레코드가 바로 LP이다. LP라는 명칭에서 알 수 있듯 무엇보다 재생 시간이 길어졌다는 것이 특징. 노래 10곡을 들으려면 최소 5장의 SP가 필요했지만, 한 면에 30분 분량이 수록 가능한 LP 덕분에 단 1장에 그 노래들을 모두 담을 수 있었다.
Q. LP의 등장은 음악사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연주 시간이 비교적 긴 클래식 음악을 대중화하는 데 핵심적 역할을 했다. 공연 무대는 시간적, 공간적 제약이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향유할 수 없었다. 그러나 SP라는 음반 포맷의 한계로 인해서 음반으로 보급되지 못했던 교향곡과 오페라 등이 LP로 제작됨으로써, 많은 사람들이 뛰어난 연주자나 오케스트라의 음악을 언제 어디서나 들을 수 있게 되었다.
Q. LP로의 회귀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사람들이 LP를 선호하는 첫 번째 이유는 아날로그 방식으로 제작해 자연에 가까운 소리를 내기 때문이다. 이 외에 디지털 음원과 달리 손으로 만지고 감상할 수 있는 예술적인 앨범 재킷도 한몫한다. 사진, 그림, 일러스트, 그래픽 등을 활용한 재킷 디자인은 예술 작품에 비견될 만하다. 실제로 앤디 워홀을 비롯한 유명 작가들이 음반 재킷 작업에 참여해 참신하고 독창적인 커버를 선보였다.
LP Music Bar
| 게스후 |
| 브라스 |
홍대 근처에 자리한 브라스는 신문사와 잡지사 기자 출신이 운영하는 곳으로 대표의 해박한 음악 지식을 들으며 감상할 수 있다는 것이 장점. 빔 스크린으로 상시 상영하는 고전 영화도 바의 운치를 더해준다.
문의 02-338-8342
| 오아시스 |
신천역 부근에 위치한 오아시스는 국내외 뮤지션들의 다양한 음반을 갖추고 있으며, 인테리어도 ‘아날로그적인 감성’을 물씬 풍긴다. 브라운관 TV, 녹음기, 다이얼 전화기 같은 추억의 물건을 비롯해 앤틱 가구와 해외여행 중 사 모은 아기자기한 소품들이 애잔한 추억을 선사한다.
문의 02-420-6274
| 피터 폴 앤 메리 |
1960년대 미국 포크 그룹 이름을 딴 피터 폴 앤 메리의 상징은 3m가 넘는 대형 스피커. 미국 최고의 스피커 브랜드 웨스턴 일렉트로닉의 첫 모델로 1930년대 극장에서 사용하던 수제품이다. 이 소리를 들어보려고 애호가들이 지방에서도 찾아올 정도라고. 강남구 신사동.
문의 02-547-2838
“진짜 음악은 보편적 공감을 이끌어낸다”
날이 추워지면 아버지는 집에서 음악을 듣곤 하셨다. 오디오를 사달라고 졸랐던 것은 정작 나였지만 아버지가 오디오를 만지는 날은 먼발치에서 부럽게 바라볼 뿐 다가가지 못했다. 그즈음 나의 일상은 음악이었고, 음악이 곧 전부였다. 금단현상은 조바심이 됐고 그런 날은 종일 아버지가 출타하시기만을 간절히 바랐다.
30년 전 그렇게 나는 오디오에 입문했다. 이후 음악을 듣는 환경은 급격하게 변했다. CD가 보급되면서 LP의 운명은 크고 작은 숍들이 연이어 문을 닫으면서 심각한 현상으로 받아들여졌다. 집안 구석에 처박혀있던 음반은 고물상이 매입했고, 후미진 도시에서 초라한 자취를 드러냈다. 영락없는 폐기물이었다. 사람들은 그때 LP가 흔적조차 남지 않고 영원히 사라질 것이라고 웅성거렸다. 웅성거림이 그 몰락의 예견으로 당연시되고 신뢰할 수밖에 없는 숱한 증거들이 등장했는데, 2000년대가 되면서 대한민국에서 마지막으로 LP를 생산하던 공장이 사라진다는 기사를 읽었을 때가 그 절정이었다. 나는 잠깐이긴 했지만 갖고 있던 LP를 처분할 것을 고민하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용기가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다행이 없다.
다시 LP를 찾는 사람들의 논리는 단순했다. 시대를 대표하고 음악적 성취가 탁월했던 당대의 음반들은 디지털이 없을 때 만들어졌던 시대의 소리를 담고 있다. 디지털 방식을 염두에 두지 않고 만들었던 음악을 디지털로 들어서는 제 맛을 느낄 수 없다. 원 음악을 만들던 방식 그대로 듣는 것이야말로 그 곡을 만든 사람들의 느낌을 제대로 재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비틀즈의 ‘Abby Road’나 롤링 스톤스의 ‘Sticky Fingers’가 빅 히트를 했던 시기에 디지털 음원이란 단어는 없었다. 80년대를 가로 질러 시대를 풍미했던 들국화, 김현식, 유재하, 김광석의 음악도 모두 아날로그 방식으로 만들어진 음악이다.
편리한 디지털 녹음 방식보다 다시 아날로그 방식을 고집하는 유명 뮤지션들이 생겨나 팬심을 자극했고, 그들을 따르는 많은 무리의 팬들은 앞 다퉈 아날로그를 선택하기 시작했다. 창고에서 숨을 죽이던 헌 LP들의 먼지를 털어냈고, 기념비적인 음반들이 새로 제작되어 선보이기 시작했다. 문을 닫았던 LP 공장도 다시 돌아간다고 한다. 이에 발맞춰 턴테이블 회사들도 속속 저렴한 신제품을 만들고 있다. CD와 다른 아날로그의 소리를 찾으려는 반격이 시작된 것이다.
LP의 부활을 그저 ‘추억 팔이’라고 폄하하는 사람도 있다. 돌아갈 수 없는 시대에 대한 향수가 깃들어 있으니 온전히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그뿐이겠는가. LP의 매력은 그것을 경험하지 않았던 많은 사람들에게 더 새로운 것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그들은 디지털 음원과 LP의 차이를 실감하면서 아날로그에 입문하기 시작한 세대다. 아날로그 음악의 부활을 만들어 준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디지털 음원이었던 것이다.
차이를 넘어 이전에 듣지 못했던 진지한 소리에 대한 탐구를 담았던 LP시절의 명반들은 요새 음악을 통해 범접하기 힘든 깊이를 느끼기도 한다. 어디서나 쉽게 접할 수 없는 깊고 풍부하게 우러나오는 감동의 세계는 음악이 얼마나 위대한 예술인가 보여준다.
직장을 다니며 돈벌이를 시작하고 오디오를 장만하면서 음악의 취향도 세월과 함께 바뀌었다. 좋았던 것이 싫어지기도 했고, 무관심했던 것에 대해 호기심이 생기기도 했다. 근래에 아버지 시대에 유행했던 음반 몇 장을 어렵사리 구해 들었다. 식민지와 전쟁을 겪었던 어른들의 음악이다. 다음 주말에는 아버지께 그 음반들을 들려드리련다. 이제는 함께 음악을 들을 수 있을 것 같다.
글쓴이 김영훈은 〈생각의나무〉, 〈오픈하우스〉 편집주간을 지냈다. 문학과 예술 분야의 책을 기획·출판해왔으며, 현재는 출판사 안나푸르나의 대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