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하지 않는 사람에게 이 세상은 한 페이지만 읽은 책과 같다.’ 중세 철학자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이다. 세상을 한 권의 책이라고 가정했을 때, 우리는 지금 어디쯤 읽고 있을까. 꾸준히 페이지를 넘기다 보면 정말이지 세상의 새로운 얼굴과 인생의 참 의미를 마주하게 될까. 특별한 여행을 다녀온 여기 이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렇다”고 답한다.
안나푸르나에서 산티아고까지 1600km를 걸은 이영철 씨
이영철(58) 씨가 갑작스레 여행을 떠난 것은 지난 2012년의 일이다. 30년을 근무한 한솔제지그룹에서 2011년 12월 퇴직한 그는 ‘백수생활’을 시작한 첫 해에 총 여섯 번에 걸친 여행을 감행했다. 2월 남해안길을 시작으로 네팔 안나푸르나, 동해안길, 지리산, 미국 서부, 그리고 스페인 산티아고까지. 혼자 떠난 트레킹 여행이었다. 그 한 해 동안 그는 자그마치 1600km를 걸었다.
평생 여행과 별다른 인연도 없었던 이 씨가 이처럼 짧은 시간 안에 많은 곳을 걸은 이유는 뭘까. “2005년 쯤, 머리가 복잡한 일이 있어서 좀 걸어야겠다는 마음으로 집을 나선 적이 있다. 아침 5시에 동네 안양천을 걷다가 학의천으로, 이어 청계산, 우면산으로, 그러고도 힘이 남아 관악산까지 올랐다. 안양예술공원 쪽으로 하산하니 8시 정도 됐더라. 하루 40㎞, 그것도 산 세 개를 타다니…. 내가 생각해도 어찌나 신기하던지. 친구들을 모두 안양으로 불러서 술을 마신 기억이 난다(웃음).”
스스로에 대한 대견함 때문인지, 애초의 복잡했던 머리는 어느새 말끔해져 있었다. 그리고 그때 이 씨는 생각했다. ‘아, 걷는 일이 내게 맞구나.’ 그 후부터 틈 날 때마다 근교를 걷곤 했다는 이 씨는 퇴직하기 3년 전부터는 본격적으로 트레킹 여행을 계획하게 된다. 신문이나 잡지에서 좋은 여행지가 눈에 띄면 오려서 보물처럼 간직했다고.
은퇴하자마자 70㎞의 남해 바래길을 걸으며 워밍업을 한 그는 다음 달 곧바로 안나푸르나로 떠났다. 해발 5415m의 설산은 결코 녹록한 상대가 아니다. 그러나 이 씨는 “힘들다고 생각한 적은 별로 없었다. 단 마지막 9일째 되는 날 고산병으로 좀 고생을 했는데, 그 때문에 정상에 올라서도 기쁨을 제대로 만끽하지 못한 것 같아 아쉽다.”
그런 그는 782㎞의 산티아고 순례길도 29일(보통 35일 정도 걸린다) 만에 완주한 괴력의 사나이다. “그곳을 다녀온 많은 이들이 ‘고행’이라고 얘기했지만, 나는 그런 생각을 전혀 못했다. 그냥 즐거운 마음만 가득했다. 걷다가 피곤하면 쉬고, 쉬었다 또다시 걷는 게 정말 좋았다.” 사진으로만 보던 곳을 걸으며 하루하루 자신의 기록을 갱신해 나가는 기분은 그야말로 황홀한 것이었다. “안나푸르나와 산티아고는 풍광 자체가 워낙 영적인 느낌을 준다. 그 숭고한 분위기를 떠올리면 지금도 가슴이 뛴다.”
1년간의 여행은 그의 많은 부분을 변화시켰다. 그중 으뜸은 뭐니 뭐니 해도 자신감 회복이다. “은퇴 후 앞으로 남은 인생을 어떻게 꾸릴까 걱정을 많이 했다.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 두렵기도 했고, 현역 친구들 앞에서 괜스레 기가 죽기도 했다. 하지만 여행을 다녀온 후로 많이 달려졌다. 그런 것은 더 이상 고민거리가 아니었다. 근거 없는 자신감, 행복감이 샘솟는달까(웃음).”
직장생활을 하는 내내 반복된 일상이 행복하지 않았다는 이 씨는 여행을 하며 살아가는 지금 진정으로 살아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됐다고. 지난해 1년여의 여행담을 바탕으로 <안나푸르나에서 산티아고까지>라는 제목의 에세이를 펴내기도 한 이 씨는 현재 여행작가라는 새로운 꿈을 품었다. 매년 한 권씩 책을 낼 것이라는 그가 요즘 준비하고 있는 것은 동해안 해파랑길을 걸으며 쓴 에세이. “가족들이 많이 응원해준다. 새벽에 글 쓰는 데 몰두하고 있으면 아내가 ‘이렇게 집중하는 모습은 평생 처음 본다’고 할 정도다. 여행을 다니는 것만큼 여행기를 쓰는 시간도 행복하다.”
165개국을 종횡무진한 국내 부부배낭여행가 1호 김현·조동현 부부
방송국 PD 출신의 남편 김현(76) 씨와 영어교사 출신의 아내 조동현(73) 씨는 국내 최초의 부부배낭여행가로 알려져 있다. 1989년 1월 1일 처음 해외여행자유화가 이뤄졌는데, 그 얼마 후인 7월에 부부는 캐나다로 배낭여행을 떠났다. 이를 계기로 세상은 부부를 주목했고, ‘국내 부부배낭여행가 1호’로 불리기 시작했다. 이후 부부는 한 해에 2~5회씩 여행을 떠났다. 그렇게 경험한 여행지가 지금까지 165개국에 이른다. 개중에는 여러 번 방문한 곳도 부지기수. 일본은 무려 70번이나 여행했다고 한다.
가장 기억에 남는 여행은 뭐니 뭐니 해도 캐나다로의 첫 배낭여행이다. “김치니 뭐니 한국 음식을 다 싸 갔다. 경비를 아끼는 차원이기도 했지만 외국에서 기죽을 필요 없다는 생각에…. 호텔에서 용감하게 라면도 끓여 먹고. 그런 일들이 기억에 참 오래 남는다.” 부부가 꼽는 최고의 여행지는 캐나다 북부와 알래스카. “산, 바다, 빙하 등 갖가지 풍물을 다 볼 수 있는 진기한 곳”이라는 이유에서다. 로키산맥은 다섯 번이나 갔다는 부부. 산 사이사이 빙하가 드러난 장대한 풍광을 잊을 수가 없다.
부부는 지난 1999년부터 ‘투 현스 트래블 클럽’이라는 이름의 여행클럽을 이끌고 있다. 부부와 함께 여행 가기를 원하는 이들의 신청을 받아 매년 여행을 떠난다. 가장 최근인 지난해 방문한 곳은 아프리카. 15일 동안 남아프리카공화국을 중심으로 여행했다. “우리 여행은 흔한 패키지 여행과는 많이 다르다. 아프리카를 종단하는 블루트레인 열차를 탄다든지, 만델라가 복역한 로빈아일랜드 감옥을 방문한다든지 하는 식의 우리 나름으로 기획한 여행이다.” 주도적으로 테마를 잡아 여행하는 것을 즐긴다는 부부. 그런 부부는 현지인도 가기 힘든 곳을 샅샅이 찾아 여행하는 데 고수다. 30년 배낭여행의 노하우일 것이다.
일흔이 훌쩍 넘은 나이에 먼 곳으로의 여행이 부담스럽진 않을까. “여행을 함께 간 이들은 ‘어쩜 그렇게 힘들어하지 않냐?’며 놀란다. 여행이란 게 습관이 돼서 괜찮다. 처음엔 비행기를 타는 것부터 타지의 낯선 냄새까지 모든 게 곤욕스러웠지만 이제 적응이 됐다.” 그래도 나이를 생각해 매년 5회씩 가던 여행을 2~3회로 줄였다는 부부다.
만약 부부에게 여행이 없었다면? 곧장 “지루했겠지(웃음)” 하는 대답이 돌아온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데 있어 혼자보다는 옆의 누군가와 협력해서 하는 게 재미도 있고 효과적이지 않나. 서로 역할을 나눠 돕기도 하면서.”
그런 부부는 여행이 부부에게 준 가장 큰 선물을 ‘대화’라고 말한다. “여행을 준비하면서, 여행을 가서 어떤 문제에 봉착했을 때, 그리고 여행을 다녀와서… 공통의 화제를 두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건 매우 뜻깊은 일이다.”
부부 사이에서 대화가 얼마나 중요한 요소인지 이 노부부는 굳이 말로 다 설명하려 들지 않는다. 다만 끝으로 덧붙인 아내 조동현 씨의 말. “간혹 힘들거나 괴로운 일이 있으면 남편과 함께했던 여행의 기억 중 달콤한 추억들을 꺼내 스스로를 위로하곤 한다. 인생의 반려자와 함께 여행하는 기쁨은 말로 다 못할 만큼 큰 힘이 된다.”
캠퍼밴으로 20일간 뉴질랜드 전역을 달린 김신묵 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