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4.01.29 09:56

People

‘여행하지 않는 사람에게 이 세상은 한 페이지만 읽은 책과 같다.’ 중세 철학자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이다. 세상을 한 권의 책이라고 가정했을 때, 우리는 지금 어디쯤 읽고 있을까. 꾸준히 페이지를 넘기다 보면 정말이지 세상의 새로운 얼굴과 인생의 참 의미를 마주하게 될까. 특별한 여행을 다녀온 여기 이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렇다”고 답한다.


안나푸르나에서 산티아고까지 1600km를 걸은 이영철 씨

안나푸르나에서 산티아고까지 1600km를 걸은 이영철 씨
2012년 네팔 안나푸르나. /©이영철

이영철(58) 씨가 갑작스레 여행을 떠난 것은 지난 2012년의 일이다. 30년을 근무한 한솔제지그룹에서 2011년 12월 퇴직한 그는 ‘백수생활’을 시작한 첫 해에 총 여섯 번에 걸친 여행을 감행했다. 2월 남해안길을 시작으로 네팔 안나푸르나, 동해안길, 지리산, 미국 서부, 그리고 스페인 산티아고까지. 혼자 떠난 트레킹 여행이었다. 그 한 해 동안 그는 자그마치 1600km를 걸었다.

평생 여행과 별다른 인연도 없었던 이 씨가 이처럼 짧은 시간 안에 많은 곳을 걸은 이유는 뭘까. “2005년 쯤, 머리가 복잡한 일이 있어서 좀 걸어야겠다는 마음으로 집을 나선 적이 있다. 아침 5시에 동네 안양천을 걷다가 학의천으로, 이어 청계산, 우면산으로, 그러고도 힘이 남아 관악산까지 올랐다. 안양예술공원 쪽으로 하산하니 8시 정도 됐더라. 하루 40㎞, 그것도 산 세 개를 타다니…. 내가 생각해도 어찌나 신기하던지. 친구들을 모두 안양으로 불러서 술을 마신 기억이 난다(웃음).”

스스로에 대한 대견함 때문인지, 애초의 복잡했던 머리는 어느새 말끔해져 있었다. 그리고 그때 이 씨는 생각했다. ‘아, 걷는 일이 내게 맞구나.’ 그 후부터 틈 날 때마다 근교를 걷곤 했다는 이 씨는 퇴직하기 3년 전부터는 본격적으로 트레킹 여행을 계획하게 된다. 신문이나 잡지에서 좋은 여행지가 눈에 띄면 오려서 보물처럼 간직했다고.

은퇴하자마자 70㎞의 남해 바래길을 걸으며 워밍업을 한 그는 다음 달 곧바로 안나푸르나로 떠났다. 해발 5415m의 설산은 결코 녹록한 상대가 아니다. 그러나 이 씨는 “힘들다고 생각한 적은 별로 없었다. 단 마지막 9일째 되는 날 고산병으로 좀 고생을 했는데, 그 때문에 정상에 올라서도 기쁨을 제대로 만끽하지 못한 것 같아 아쉽다.”

그런 그는 782㎞의 산티아고 순례길도 29일(보통 35일 정도 걸린다) 만에 완주한 괴력의 사나이다. “그곳을 다녀온 많은 이들이 ‘고행’이라고 얘기했지만, 나는 그런 생각을 전혀 못했다. 그냥 즐거운 마음만 가득했다. 걷다가 피곤하면 쉬고, 쉬었다 또다시 걷는 게 정말 좋았다.” 사진으로만 보던 곳을 걸으며 하루하루 자신의 기록을 갱신해 나가는 기분은 그야말로 황홀한 것이었다. “안나푸르나와 산티아고는 풍광 자체가 워낙 영적인 느낌을 준다. 그 숭고한 분위기를 떠올리면 지금도 가슴이 뛴다.”

1년간의 여행은 그의 많은 부분을 변화시켰다. 그중 으뜸은 뭐니 뭐니 해도 자신감 회복이다. “은퇴 후 앞으로 남은 인생을 어떻게 꾸릴까 걱정을 많이 했다.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 두렵기도 했고, 현역 친구들 앞에서 괜스레 기가 죽기도 했다. 하지만 여행을 다녀온 후로 많이 달려졌다. 그런 것은 더 이상 고민거리가 아니었다. 근거 없는 자신감, 행복감이 샘솟는달까(웃음).”

직장생활을 하는 내내 반복된 일상이 행복하지 않았다는 이 씨는 여행을 하며 살아가는 지금 진정으로 살아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됐다고. 지난해 1년여의 여행담을 바탕으로 <안나푸르나에서 산티아고까지>라는 제목의 에세이를 펴내기도 한 이 씨는 현재 여행작가라는 새로운 꿈을 품었다. 매년 한 권씩 책을 낼 것이라는 그가 요즘 준비하고 있는 것은 동해안 해파랑길을 걸으며 쓴 에세이. “가족들이 많이 응원해준다. 새벽에 글 쓰는 데 몰두하고 있으면 아내가 ‘이렇게 집중하는 모습은 평생 처음 본다’고 할 정도다. 여행을 다니는 것만큼 여행기를 쓰는 시간도 행복하다.”


165개국을 종횡무진한 국내 부부배낭여행가 1호 김현·조동현 부부

165개국을 종횡무진한 국내 부부배낭여행가 1호 김현·조동현 부부
2003년 베트남 하 롱베이. /©김현·조동현

방송국 PD 출신의 남편 김현(76) 씨와 영어교사 출신의 아내 조동현(73) 씨는 국내 최초의 부부배낭여행가로 알려져 있다. 1989년 1월 1일 처음 해외여행자유화가 이뤄졌는데, 그 얼마 후인 7월에 부부는 캐나다로 배낭여행을 떠났다. 이를 계기로 세상은 부부를 주목했고, ‘국내 부부배낭여행가 1호’로 불리기 시작했다. 이후 부부는 한 해에 2~5회씩 여행을 떠났다. 그렇게 경험한 여행지가 지금까지 165개국에 이른다. 개중에는 여러 번 방문한 곳도 부지기수. 일본은 무려 70번이나 여행했다고 한다.

가장 기억에 남는 여행은 뭐니 뭐니 해도 캐나다로의 첫 배낭여행이다. “김치니 뭐니 한국 음식을 다 싸 갔다. 경비를 아끼는 차원이기도 했지만 외국에서 기죽을 필요 없다는 생각에…. 호텔에서 용감하게 라면도 끓여 먹고. 그런 일들이 기억에 참 오래 남는다.” 부부가 꼽는 최고의 여행지는 캐나다 북부와 알래스카. “산, 바다, 빙하 등 갖가지 풍물을 다 볼 수 있는 진기한 곳”이라는 이유에서다. 로키산맥은 다섯 번이나 갔다는 부부. 산 사이사이 빙하가 드러난 장대한 풍광을 잊을 수가 없다.

부부는 지난 1999년부터 ‘투 현스 트래블 클럽’이라는 이름의 여행클럽을 이끌고 있다. 부부와 함께 여행 가기를 원하는 이들의 신청을 받아 매년 여행을 떠난다. 가장 최근인 지난해 방문한 곳은 아프리카. 15일 동안 남아프리카공화국을 중심으로 여행했다. “우리 여행은 흔한 패키지 여행과는 많이 다르다. 아프리카를 종단하는 블루트레인 열차를 탄다든지, 만델라가 복역한 로빈아일랜드 감옥을 방문한다든지 하는 식의 우리 나름으로 기획한 여행이다.” 주도적으로 테마를 잡아 여행하는 것을 즐긴다는 부부. 그런 부부는 현지인도 가기 힘든 곳을 샅샅이 찾아 여행하는 데 고수다. 30년 배낭여행의 노하우일 것이다.

일흔이 훌쩍 넘은 나이에 먼 곳으로의 여행이 부담스럽진 않을까. “여행을 함께 간 이들은 ‘어쩜 그렇게 힘들어하지 않냐?’며 놀란다. 여행이란 게 습관이 돼서 괜찮다. 처음엔 비행기를 타는 것부터 타지의 낯선 냄새까지 모든 게 곤욕스러웠지만 이제 적응이 됐다.” 그래도 나이를 생각해 매년 5회씩 가던 여행을 2~3회로 줄였다는 부부다.

만약 부부에게 여행이 없었다면? 곧장 “지루했겠지(웃음)” 하는 대답이 돌아온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데 있어 혼자보다는 옆의 누군가와 협력해서 하는 게 재미도 있고 효과적이지 않나. 서로 역할을 나눠 돕기도 하면서.”

그런 부부는 여행이 부부에게 준 가장 큰 선물을 ‘대화’라고 말한다. “여행을 준비하면서, 여행을 가서 어떤 문제에 봉착했을 때, 그리고 여행을 다녀와서… 공통의 화제를 두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건 매우 뜻깊은 일이다.”

부부 사이에서 대화가 얼마나 중요한 요소인지 이 노부부는 굳이 말로 다 설명하려 들지 않는다. 다만 끝으로 덧붙인 아내 조동현 씨의 말. “간혹 힘들거나 괴로운 일이 있으면 남편과 함께했던 여행의 기억 중 달콤한 추억들을 꺼내 스스로를 위로하곤 한다. 인생의 반려자와 함께 여행하는 기쁨은 말로 다 못할 만큼 큰 힘이 된다.”


캠퍼밴으로 20일간 뉴질랜드 전역을 달린 김신묵 씨

캠퍼밴으로 20일간 뉴질랜드 전역을 달린 김신묵 씨
2013년 뉴질랜드 퀸스타운. /©김신묵
육군중령으로 30년간의 군 생활을 마감한 후 현재 문화유산 관련 강좌를 진행하고 있는 김신묵(59)씨는 지난해 가을 동호회 ‘내나라문화유산답사회’의 동년배 회원 세 명과 함께 캠퍼밴으로 뉴질랜드 전역을 여행했다. 일반 여행사 패키지여행을 시작으로 배낭여행, 오지여행 등 각국을 두루 여행한 경험이 있는 김 씨.

“나이가 들면서 일반 자유여행에는 체력적·정신적 한계가 뒤따를 것 같았다. 그래서 내 나름의 세 가지 여행을 구상했다. 캠퍼밴, 크루즈, 특급열차 여행이다”. 그 첫 번째인 캠퍼밴 여행을 지난해 시도한 셈.

“캠퍼밴은 모든 여행자의 로망일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요새 조금씩 보이긴 하지만 기반시설이 약해 아직 활성화되긴 힘든 것 같다. 뉴질랜드는 캠퍼밴 여행이 매우 일상화돼 있다. 게다가 땅은 넓고 인구는 적은 데다 자연이 아름다우니 캠핑카로 여행하기엔 제격이다.”

낯선 환경에 대한 두려움만 없다면 캠퍼밴 여행을 못할 이유가 없다고 강조하는 김 씨. 그에 따르면, 준비 과정도 전혀 복잡하지 않다. 여행 전 인터넷으로 차량을 예약하고 관련 서류를 메일로 주고받으면 끝이다. 캠핑카 관련 사이트에 가입하면 지도와 숙소도 편리하게 안내받을 수 있다.

2013년 뉴질랜드 퀸스타운. /©김신묵
“처음엔 자동차 안에서 잠자고 생활하는 게 불편하지 않을까 걱정도 좀 했다. 정 힘들면 캠핑카 캠핑장에 마련된 숙소를 이용해야겠다고 마음먹었지만 막상 이용해보니 전혀 힘들지 않았다.” 오히려 캠퍼밴은 김 씨 일행에게 새로운 경지의 자유를 선사했다. “모든 스케줄을 내 마음대로 짰다. 날마다 체크인·체크아웃할 필요도 없고, 무거운 짐을 꺼냈다 넣었다 할 필요도 없었다.” 무엇보다 가장 감동을 준 것은 길에서 만난 아름다운 풍경 자체. 멋진 산이나 호수를 만나면 그 앞에 캠퍼밴을 멈추고 밤을 보냈다. 발길 닿는 대로 이곳저곳을 누빈 일행은 골프도 치고 와이너리 투어나 스파 체험도 하며 알찬 하루하루를 보냈다고.

더욱이 캠퍼밴 여행만의 특별한 재미도 경험했다. “맛있는 현지음식을 사 먹는 것도 좋았지만 가끔은 한국 음식 생각이 나서 직접 요리를 하기도 했다. 캠핑장 내 주방 공용 냉장고에는 이전 여행자들이 남기고 간 음식 재료가 많다. ‘free food’라는 메모와 함께 음식을 놓고 가는 날짜까지 기록해두었다. 그런 모습에서 여행자들 간의 공감대를 느꼈다. 이런 게 캠퍼밴 여행의 묘미 아닐까 생각했다.”

김 씨의 뉴질랜드 방문은 이번이 두 번째. 4년 전엔 오지 투어의 일환으로 짧게 머문 적이 있지만 이번에는 남성과 북섬을 완전히 종단했다. 파라다이스라 불리는 뉴질랜드의 대표적인 피오르 밀퍼드사운드, 만년설이 쌓인 해발 3754m의 마운틴쿡 등을 둘러불 때는 그 아름다움에 넋을 잃고 말았다고. ‘여기는 지구별이 아니다. 우주여행을 하다 잠시 불시착한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을 정도. 김 씨는 “어디를 봐도 영화 속 풍경 같았다. 낯설고 매혹적이었다. 우리가 흔히 보는 생태계와는 완전히 다른 곳이었다”며 뉴질랜드를 또다시 여행하고 싶은 마음을 드러냈다.

퇴직한 2005년부터 ‘인생 2막’에 대한 고민으로 여행에 몰입하게 됐다는 김 씨는 어느 새 자신의 인생을 여행 위주의 삶으로 바꾸었다. “여행을 다니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인생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된다. 힘든 오지 여행을 자청해서 다닌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라고 말한 그는 이번 캠퍼밴 여행이 ‘새로운 형태, 새로운 차원’의 여행이라는 데 의미를 둔다. 게다가 뉴질랜드를 택함으로써 멋진 풍광까지 덤으로 얻게 됐으니 일석이조. “여행의 의미를 말로 설명하긴 힘들다. 단지 느낌으로 간직할 뿐이다. 직접 경험해보지 않고선 결코 알 수 없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