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라곤 노래방밖에 몰랐다는 남자. 2년 전부터 이 평범한 남자의 인생은 180도 바뀌었다. 화려한 의상으로 치장한 채 런웨이를 누비는가 하면 신제품을 손에 들고 광고 카메라 앞에 서기도 했다. 말하자면 그는 ‘모델’이 됐다.
주인공 김성훈(54) 씨.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하고 일찌감치 대우그룹에 입사한 그는 ‘일반 사무직’ 종사자로 꽤 긴 시간을 지냈다. 그러다 서른아홉 살인 1999년 대우그룹 해체 사태로 인생의 전환기를 맞는다. 회사를 정리하면서 자영업으로 선회, 지금은 수도‧전기검침용역업체 등 총 6개의 사업체를 운영하고 있다. 이 정도의 필모그래피로 이야기한다면 김 씨의 인생은 조금 평범한 듯 보인다. 하지만 이제 차츰 화려한 스포트라이트에 적응하고 있다는 3년 차 시니어 모델 김성훈 씨에 대해서라면 얘기가 다르다.
“관객이 그렇게나 열광할 줄이야…”
“노년을 재미있게 보내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선 미리 준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그는 나중에라도 꼭 하고 싶은 일 중 하나로 모델 활동을 염두에 두었다. “예순다섯 정도 되면 ‘시니어모델’에 한번 도전해봐야지 했었다. 그러고 보면 생각보다 조금 빨리 꿈을 이룬 셈이다(웃음).”
김 씨에게 모델 활동은 결코 갑작스러운 일이 아니다. 그는 일찍이 패션에 눈뜬 멋쟁이였다. 군 전역 후부터, 그러니까 진짜 어른 노릇을 하게 된 후부터는 슈트와 셔츠, 구두, 하다못해 넥타이 하나까지 일일이 직접 골랐다. 보통의 남자들이 그렇듯 결혼 후에는 아내의 손을 빌릴 만도 한데 지금껏 한 번도 그러지 않은 것은 그만큼 패션에 대한 관심이 지대하기 때문.
“패션에는 돈으로 살 수 없는 귀한 만족감이 있다고 믿는다. 나뿐 아니라 타인도 옷이나 액세서리 같은 것으로 꾸며서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는 게 좋다.”
그런 김 씨가 본격적으로 꿈에 한 발짝 다가서게 된 것은 2년 전 지인으로부터 우연히 ‘뉴시니어라이프’에 대한 정보를 전해 들으면서부터다. 뉴시니어라이프는 시니어모델교실을 운영하는 사회적 기업. ‘구경이나 한번 가보지 뭐’ 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걸음한 그는 곧장 시니어모델교실에서 4개월간의 기초과정 코스를 밟았다. 워킹을 비롯해 포즈, 표정연기 등을 모두 그곳에서 배웠다.
수강을 마치자 몇 달 후 첫 무대의 기회가 찾아왔다. 대치동 섬유센터에서 열린 ‘제1회 액티브 시니어모델 결선대회’가 그것.
“80여 명의 모델이 런웨이를 걸었다. 정장과 캐주얼 복장을 각각 한 번씩 선보였는데, 많이 떨렸다. 그렇지만 기분이 정말 말도 못하게 좋았다. 관객이 그렇게나 열광할 거라곤 상상도 못했다.” 그 순간 김 씨는 제2의 꿈을 이뤘다는 것을 실감했다. “무대라곤 노래방밖에 몰랐던 내가 그토록 화려한 런웨이에 서게 될 줄이야.”
김 씨에겐 무엇보다 가족의 응원이 큰 힘이 됐다. 첫 무대를 직접 본 아내와 어머니는 그의 든든한 후원자. “사람은 누구나 남에게 인정받는다는 것에 보람을 느낀다. 그중 제일은 부모님에게 인정받는 게 아닐까. 처음 내가 모델 일을 한다고 했을 때 여든이 가까운 어머니는 그저 ‘또 새로운 걸 시작했구나’ 하셨지만, 막상 첫 무대를 보시고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셨다. 무대 위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선 내 모습에 감탄하셨다. 어머니께 칭찬을 받으니 으쓱하고 더 뿌듯했다.”
이후에도 그는 서울시가 주최한 청계천 수상패션쇼, 세계노년학노인의학대회 초청 시니어패션쇼, 재독일대한간호사회 초청 시니어패션쇼 등 10여 회의 패션쇼 무대에 올랐다. 이 밖에 지난해에는 SK텔레콤에서 중장년을 겨냥해 출시한 2G폰의 광고모델로 발탁됐으며, 간간이 잡지모델로도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키 172㎝… 당당한 도전
“활동은 열심히 하지만 아직 수입을 셈할 정도는 아니다. 내게 모델 일은 ‘사회인야구단’ 같은 것이다.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원하는 일을 하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 물론 쇼나 광고 등 시니어모델이 설 수 있는 무대가 많아지면 수입도 올라갈 것이다. 요새 들어 니즈가 점점 늘고 있다는 것을 실감한다.”
어떤 일이든 새롭게 배우고 도전하는 것 자체가 즐겁다는 김 씨. 그는 운동이나 춤, 음악에도 관심이 많다. 골프나 당구는 수시로 치고, 최근엔 대금과 성악을 배우고 있다. 룸바나 차차차 같은 라틴댄스도 10년째 추고 있다. 실제로 일주일에 3일은 아내와 함께 댄스교실을 찾는다는 그다. 이런 일련의 활동은 모델 일에도 더없는 거름이 된다. “쇼에서 워킹 외 별도의 퍼포먼스를 연출할 기회가 종종 있다. 청계천 수상패션쇼에서는 라틴댄스를, 독일 무대에서는 싸이의 ‘강남스타일’을 선보이기도 했다.”
일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런웨이에서 다 풀어버린다는 그를 동년배 친구들이라면 부러워하지 않을 리 없다. “같이 활동하는 여성 모델 중에 미스코리아 출신도 있다고 하니 매우 부러워하더라(웃음). 그러나 막상 모델을 하겠다고 나서는 친구는 없다. 하고는 싶어도 일 때문에 시간 내기가 힘들거나 용기가 부족한 탓이다.”
하지만 김 씨는 관심만 있다면 누구든 할 수 있는 일이라고 강조한다. “내 키는 172㎝다. 젊은 시절이었다면 가당치도 않은 조건이지만, 시니어모델 세계에서는 가능하다. 당당히 도전하시라. 건강한 신체와 정신만 지니고 있다면 누구든 할 수 있다. 이보다 즐거운 취미가 어디 있을까. 자신의 끼를 맘껏 발산할 수 있는 기회다.”
적성에 꼭 맞는 이 일을 쓰러지는 날까지 계속하고 싶다는 김 씨. “앞으로 더 콘셉트 있는, 전문적인 무대에 서 보고 싶다. MD와 기자, 전문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디자이너가 직접 만든 옷을 멋지게 소화하고 싶다”는 포부를 밝히는 그는 지금 진정한 프로로 나아가는 길 위에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