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바다엔 말이 파도친다

나희덕<사진> 시인이 바닷가에 섰다. 그는 야생 동물처럼 밀려오는 파도에서 말의 형상을 본다.

'말들이 돌아오고 있다/ 물방울을 흩뿌리며 모래알을 일으키며/ 바다 저편에서 세계 저편에서// 흰 갈기와 검은 발굽이/ 시간의 등을 후려치는 채찍처럼/ 밀려오고 부서지고 밀려오고 부서지고 밀려오고…'('말들이 돌아오는 시간' 중)

2014년 말의 해에 1966년생 말띠 시인이 5년 만에 새 시집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문학과지성사)을 냈다. 시인은 바다 저편에서 달려드는 파도(말)를 온몸으로 끌어안는다. 파도는 말(馬)인 동시에 말(言語)이다. 시인은 '이 해변에 이르러서야/ 히히히히힝, 내 안에서 말 한 마리 풀려나온다//…// 수많은 말들이 돌아와 한 마리 말이 되어 사라지는 시간'이라고 노래한다. 존재의 시원인 바다에서 시인의 가슴으로 들어온 수많은 말을 한마디 말로 풀어내는 게 바로 시(詩)인 것이다.

정지용도 파도가 밀려오고 밀려나가는 모습을 동물 움직임에 비유했다. '바다는 뿔뿔이/ 달어 날랴고 했다// 푸른 도마뱀 떼같이/ 재재발렀다…'('바다2' 중). 유치환의 '이것은 소리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海原)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깃발' 중)이란 절창도 연상시킨다.

문학평론가 남진우는 시집 해설에서 "(시인은) 죽음으로부터, 무의 바다로부터 귀환한 언어를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1989년 등단 이후 생명이 깃든 삶의 표정을 따뜻하게 그려왔던 나희덕에게 그동안 무슨 일이 생긴 걸까. 모진 세태 때문이었을까. 시인은 '한때 나는 뿌리의 신도였지만/ 이미 허공에서 길을 잃어버린 지 오래인 사람'('뿌리로부터' 중)이라고 음울한 노래를 불렀다. '나부끼는 황홀 대신/ 스스로의 棺(관)이 되도록 허락해주십시오'('어떤 나무의 말'중)라고까지 했다.

시집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은 시인이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겪으며 상실과 부재의 분위기로 가득한 동굴을 통과하면서 낸 시집이다. 그러나 시인은 세상을 다시 바라보며 새로운 시 한 편을 기다린다. '무언가, 아직 오지 않는 것'('무언가 부족한 저녁' 중)이 시인을 계속 시 쓰기로 불러낸다. 파도가 말 떼의 형상으로 달려오듯 미지의 언어가 시인의 가슴을 쉼 없이 때리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