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役은 재미없더라고, 만날 바른말만 하잖아

전장의 바람은 거셌다. 갈대밭이, 적군과 아군의 깃발이 요동을 쳤다. 목책(木柵)에 기대 숨을 고르고 있던 그가 1m짜리 칼을 쥐며 일어섰다. 고함을 지르며 칼을 휘두르자 왜적 5명이 순식간에 나가떨어졌다. 얼굴에 땀이 흥건하다. "어휴, 더워." 고려 장수 이성계, 유동근(58)이었다.

'정통 사극'의 부활을 알리며 인기를 끌고 있는 KBS 주말 사극 '정도전'의 촬영이 있던 28일 경북 경주에 있는 한 목장에서 '황산(荒山)전투'가 재현됐다. 유동근의 얼굴과 양손이 식용 색소와 물엿·커피를 섞어 만든 핏물로 번뜩였다. 내복에 한복 저고리, 중단(中單·고려 홑옷), 갑옷에 털옷까지 입으니 덩치도 위협적으로 컸다. "옷 무게만 7~8㎏이 나가요. 사극에서 육체적인 고생이야 기본이죠." 칼에 찔려 살점이 떨어져 나간 왼쪽 새끼손가락을 휴지로 감싸며 그가 말했다.

드라마가 조선 건국을 다루는 까닭에 그가 태종 이방원을 연기했던 KBS '용의 눈물'(1996)은 늘 따라다니는 꼬리표다. 유동근은 "수염 붙이기 싫어 도망 다니던 철없던 시절이었다"고 했다. "대하 사극의 중요성을 하나도 몰랐죠. 그냥 캐릭터에 몰입하기만 했어요. 지금은 달라요. 요새 역사적 사실을 제대로 탐구하는 사극이 별로 없잖아요. 소명 의식을 갖고 연기하고 있죠." 이방원에서 이성계가 되는 사이 18년이 흘렀다. 그의 구레나룻도 희끗희끗했다. "지금은 이방원 대사조차 기억이 안 나요. 이성계만 있을 뿐이죠." 그런 그지만 이번 드라마를 위해 '용의 눈물' 녹화 테이프도 돌려 보고, 예전 대본도 꺼내 읽어 봤다고 했다. "고(故) 김무생 선생님은 어떻게 연기하셨나, 그 시대의 맥락은 어땠나 살폈죠. 당시를 알아야겠더라고요."

김무생표 이성계와 확실히 다른 점은 그가 함경북도 사투리를 쓴다는 점이다. 사투리 코치에게 일주일에 한 번 교육을 받는다. 그의 말투에 이미 북녘의 운율이 배 있었다. 대본에도 "남원에 보급을 꾸는(끊은) 이유가 뭐였슴까(뭐였습니까)" "패한 거이(것이) 아니라 유인하눈겜다(유인하는 겁니다)"와 같은 사투리가 눈에 띄었다. 그가 캐스팅 제의에 바로 응한 이유도 사투리 때문이었다. "새롭잖아요. 어투가 너무 세서 오리지널 함경도 사투리를 쓰진 않지만, 도성에 가서는 최대한 누르고, 가족끼린 가감 없이 사투리를 꺼내는 입체성도 있고요. '용의 눈물'이 워낙 재방송이 많이 돼 이방원 이미지가 셌는데 그걸 극복하고 싶기도 했죠."

연기에 대해 묻자 그가 가느다란 담배를 꺼내 물었다. "정말 연기라는 게 뭔지… 수학 공식처럼 외워서 표현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연기 오래 한다고 대본 쉽게 외워지는 것도 아니고. 늘 숙제가 생기죠." 그의 연기론은 '여백'에 있다. "배우가 무식해도 문제지만 너무 많이 알아도 안 돼요. 괜히 똑똑한 척하게 되죠. 그럼 연출자와 작가의 의도에 반하게 되거든요. 대본만 충실히 보면 돼요." 그는 사우나에 갈 때도 대본을 끼고 간다.

왕(王) 전문 배우답게 그는 특유의 저음으로 천천히 말했다. 지금껏 조선 태조와 태종은 물론 세조·연산군, 왕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까지 섭렵했다. 그러다 보니 고려는 '태조 왕건'의 최수종이, 조선은 유동근이 세웠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다. 그는 "최수종이 연기하는 왕이 반듯한 '정석'을 보여준다면, 저는 남자 체취 진하고 인간적인 혼란이 심한 왕"이라고 했다. 남성성 덕에 이순신·계백·연개소문 같은 장군 역도 많이 했지만 선비 역은 별로 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1996년에 조광조 역을 해봤는데 맛이 안 나더라고요. 말도 안 타고 칼도 안 쓰고 만날 바른말만 하고…. 재미가 없어."

그가 말에 올라탔다. 경북 문경에 있는 승마장에서 하루 25만원 내고 빌려온 열 살짜리 갈색 말이다. "왕 되면 백마로 바꿔 탈 거예요." 이럇, 그의 고함이 쩌렁쩌렁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