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니어에세이] 솔섬 가는 길

서울에 눈이 내렸다. 함박눈이 내린 새벽길을 나섰다. 아직 어두운 길을 발걸음 가볍게 걷는다. 보통 때라면 이불 속으로 더 파고 들어가야 할 시간이다. 한적한 도로 위로 일상에 바쁜 차들이 하나둘 지나갈 뿐 사위는 더없이 조용하다. 잠시 망설인다. 버스를 탈까? 아님 택시를 탈까? 일단 길부터 건너야 했다. 눈이 내려 얼어붙은 길을 조심스럽게 걷는다. 마을버스 오는 쪽을 내려다보아도 버스는 올 기미가 없고 저 멀리 붉은빛이 점점 다가오고 있다. 택시다. 마을버스를 타려고 했던 마음을 재빨리 접고 택시에 올라탔다. 아직 잠이 덜 깬 운전기사가 어디로 갈 것이냐고 묻는다. 청량리역으로 가자고 한 후 택시의 뒷자리에 깊숙이 눌러앉았다.

어느 시인이 눈 내리는 날 겨울 풍경을 보면서 쓴 시가 생각났다. ‘머뭇대지도 않고 서성대지도 않고 너에게로 가고 싶다’ 지금 마음속 속삭임이 꼭 그렇다. 날씨는 영하 5도라는데 전혀 춥지가 않은 것은 바로 이 속삭임 때문이다. 나는 지금 머뭇대지도 않고 서성대지도 않고 솔섬으로 가고 있다. 솔섬은 강원도 삼척시 원덕읍 월천리에 있다. 서정적인 풍경으로 영국의 유명한 흑백 사진작가 마이클 케냐가 솔섬 사진을 찍어 유럽에 센세이션을 일으킨 곳이다. 사실 원 지명은 솔섬이 아니고 ‘속섬’이다. 그런데 이 사진을 찍은 마이클 케냐가 소나무가 있는 섬이라 하여 작품명을 솔섬으로 명기하는 바람에 많은 사람들이 솔섬으로 부르기 시작했단다.

솔섬은 섬이 아니라 정확히 말하면 모래톱이라 한다. 천여 평 정도 되는 넓이로 덕풍계곡과 동활계곡이 만나는 곳에서 가곡천으로 불리며 동해로 흘러들기 직전에 유속이 느려지면서 흘러내려 오던 흙과 모래들이 쌓여서 만들어진 모래톱이다. 해당화가 곱게 피어나는 이곳은 호신리와 월천리 사람들이 농작물을 가꾸며 살아가는 터전이었다. 그런 그곳이 저작권 논쟁의 중심에 서 있다. 사진 애호가들이 즐겨 찾는 강원도 삼척 솔섬을 찍은 김성필 작가의 사진을 두고서다. 흑백 사진작가 마이클 케냐의 한국 에이전시 공근혜 갤러리가 ‘솔섬’과 비슷한 김 작가의 사진을 광고에 사용한 대한항공을 상대로 3억 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내면서다. 그 청구소송 배경이야 자신이 찍은 같은 자리에서 사진을 찍었으니 지적 재산권 침해라는 것이다. 그 것이 옳고 그름을 떠나 사진으로 보는 풍광에 반해 길을 나섰다.

동해시에 들어서자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처음엔 그저 ‘아 눈이 내리는구나’ 했는데 눈은 곧 5m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폭설로 변했다. 선택해야 했다. 여기서 머물며 눈이 그치기를 기다리든지 빨리 남쪽으로 내려가든지. 차를 운전하는 입장에선 겁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서둘러 점심을 먹고 길을 나섰다. 우린 남쪽으로 눈이 오지 않을 곳으로 내려가기로 했다. 잘못하면 폭설에 갇힐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7번 국도 여기저기서 비상등을 켠 차들이 멈추어 섰다. 앞에 가는 차가 비틀거리기 시작하더니 산비탈 밑에 가까스로 섰다. 나도 이 길은 못 가겠다고 주인이 하라는 대로 움직이던 자동차가 태클을 거니 운전하는 사람이나 같이 타고 있는 사람이나 마음이 조마조마하다. 죽어도 못 가겠다고 저렇게 한 번 서버리면 꼼짝없이 눈에 갇힌다는 걸 모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앞에 가는 차가 보이지 않는다. 백미러로 뒤를 봐도 따라오는 차가 없다. 그렇다고 나선 길을 멈추면 끝내는 폭설에 발이 묶일 건 뻔한 사실이라 가는 데까지 가야 했다. 앞이 보이지 않는 길을 거북이 뜀박질하듯 달리다 잠시 창문을 열고 내다보았다. 운전하는 이의 심정이야 알 바 없다는 듯 나도 모르게 함성이 터져 나온다. 나무 풀이나 하다 못 해 바위까지도 제 빛깔은 찾아보기 힘들다. 어디를 보나 눈꽃이 활짝 피어 눈이 부시다. 언제였던가! 저런 아름다움을 본 것이…. 카메라의 셔터를 열심히 눌러댄다.

"저기가 솔섬이야!" 하는 말에 후다닥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사진에서 보는 그 풍경대로 소나무 숲으로 이루어진 솔섬이 폭설이 내리는 눈발 속에 서 있다. 차를 잠깐 세우고 솔섬을 바라본다. 강물이나 바다는 보이지 않고 눈 속에 오로지 소나무만 서서 하염없이 우릴 바라보고 섰다. 눈이 오지 않았으면 그곳으로 달려갈 터인데 나도 바라만 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돌아서고 말았다.

섬은 늘 멀리에 있다더니 오늘의 솔섬도 내게는 너무나 멀리에 있는 섬이다. 가려고 그 추운 겨울 새벽길을 나섰건만 하늘이 내게 바라보기만 하라니 그럴 수밖에 없다.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마음속에 일고 있는 거친 파도를 잠재워야 할 것이다. 그러나 언젠가는 바다와 강과 하늘과 땅을 함께 품은 솔섬을 만나기 위해 이곳에 돌아올 것이라는 것을 나는 안다. 

[주] 혹시 가려는 분들은 일몰이나 일출 무렵에 가야 저 사진 같은 풍광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