껍데기는 생명의 질박(質朴)한 토기(土器)다. 그 껍데기가 생명을 안고, 키우고, 지킨다. 화려한 진홍빛 수박 껍질은, 노란 알맹이가 가득 찬 귤의 껍질은 아이에게 겨울 속옷 입혀 주는 엄마다. 불면의 밤에 이불 차는 아이를 덮어 주는 아빠다. 그 덕분에 아기 배는 과육(果肉)이 된다.
어떤 때는 사과의 껍질을 깎기가 아깝다. 청홍 빛이 점점이 박힌 사과를 껍질째 먹는다. 콜라비는 로마 황제다. 보랏빛 도포가 예리한 칼날에 펄럭인다. 양배추는 겉에서부터 단단히 차간다. 양배추의 올록볼록한 넓은 속잎은 설야(雪野)를 처음 걷는 뽀드득 소리가 이빨에 박힌다. 그런데 이 껍질은 무엇이 만드는 걸까?
흙은 원초적이다. 검음과 누름이 흙빛이다. 그 검음 속에서 인고(忍苦)하고, 그 누름 속에서 황소 웃음의 치유력이 저 껍질로 되었나 보다. 나이 든다는 것은 껍질이 성장하는 것 같다. 껍질 없으면 들어온 게 다 어디로 갈까. 땅에서 아무리 양분을 끌어 올려봐야 물은 마를 거고, 덩달아 온 무수한 성분의 자양분들도 작디작은 방울 방울로 중력에 의해 지상으로 회귀할 것이다. 껍질이 없는 세상은 있을 수가 없다.
껍질은 물의 정령이다. 껍질을 까면 아무리 맛있는 귤도 조금만 지나면 냉각 질소액에 담가둔 것처럼 딱딱해진다. 얕보던 껍질을 까서 버리자 귤은 더는 그 촉촉한 피부를 지켜 내지 못한다. 껍질은 버린다고 버려지는 게 아니다. 버리면 소금기둥처럼 굳어 버려진다. 껍데기는 내용의 모든 것을 규정하는 사전이고, 책의 제본이다. 아무리 좋아도 모이고, 묶이지 않으면 꿰지 않은 보석 구슬이다. 몸이 없다면, 위대한 영혼이 자리 잡고 큰 근본 자리도 없다. 근본은 껍데기라야 담긴다. 마치 포도주를 담는 오크통 같기도 하다. 이게 있어야 포도를 넣어 질겅질겅 발아 그 통속에 세월을 인고하고, 꿈꾸고, 진한 농도로 삶의 변화를 체험한다. 술의 신 박카스가 사랑하는 술은 모두 껍데기에서 날개를 달고 달콤하고 그윽한 꿈같은 승천을 체험한다. 껍데기는 술을 담는 데 코아 중의 코아다. 껍데기야말로 실질이다.
호두나무에 달린 호도는 밝은 연둣빛이다. 두꺼운 껍질을 무리해서 까지 않고 시간을 오래 기다리면 석유 빛으로 흐물흐물해진다. 그러면 단단한 호두가 보인다. 그걸 다시 씻어 건조하면 그게 우리가 흔히 보는 딱딱한 호두다. 그걸 다시 단단한 망치 등으로 깨야 부드럽고 고소한 호두가 나온다. 껍질은 이렇게 가족 같고, 성벽 같고, 실질적이게 중요하다. 누가 껍질을 껍데기라고 가라고 했을까? 울퉁불퉁 못생겼어도 한라봉 껍질은 애플로 떠나버린 한 여성 CEO가 부흥시킨 고가의 버버리 옷맵시보다 못하지 않다. 세상에 이것보다 약한 게 없으면서, 세상에 이것보다 강한 게 없는 것은 바로 껍질이고 껍데기다.
삼국지의 호걸 영웅과 군마의 역사도 뇌 속에서 보고, 듣고, 생각하고, 결단하고, 지시해 얻은 결과라면, 또, 숱한 호걸과 병졸과 백성과 말과 짐승과 물고기의 두뇌가 다 뇌 신호의 결과라면 세상은 얼마나 많은 병렬적이고, 계산할 수 없는 전기 신호와 영상 처리 시뮬레이션의 교차로 이뤄진 걸까. 어쩌면 모든 생명은 다양한 기능적인 껍질 덕택에 존재하는 게 아닐까. 껍데기는 가라고 한 인물들은 인생을 오래 살지 못한 게 분명하다. 부러우면 지는 거라는 말은 그 증거다. 껍질이란 공존의 공간이나 표면이 있어야 생명은 깃드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