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니어 에세이] 그 한 사람 있나요?

'외환위기 때도 이렇지는 않았다.' 경제적 상황이 이례적으로 어렵다고 느낄 때 곧잘 입에 오르내리는 말이다. 아마 지난해 하반기 들어 특히 여의도 증권가에서 이런 말들을 쏟아지지 않았을까 싶다. 증권사들의 수익이 크게 줄어들면서 대부분 적자를 면치 못했기 때문이다. '주요 고객들께 식용유 한 병 선물하지 못하기는 이번 설이 처음'이란 증권사까지 있다. 게다가 최근 세계경제 전망도 썩 좋지 않은 마당이니 어디 여의도 직장인들 속만 편치 않을까. 연봉 삭감은 그래도 나은 편인지 모른다. 노심초사의 핵은 인원 감축이다. 타의에 의해 내 삶의 방향과 질이 틀어지는 기막힌 상황에 놓이게 되니 말이다.
 
그러나 내가 주체가 되어 사람 수를 줄인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물론 직장에서야 불가능한 일이라고 해도 내 주변의 사람은 내 스스로 줄여 볼 수 있지 않은가. 책상 서랍에 넘쳐나는 명함, 휴대전화기에 가득 들어찬 전화번호의 이름과 사진들을 줄임으로써 물적으로 또 심적으로도 사람들을 정리해 보는 것이다. 명함을 나누고, 전화번호를 저장하며, 함께 사진을 찍었을 때는 분명 서로 호의를 느꼈을 터다. “언제 밥이나 먹자”는 말도 오갔을 법하다. 하지만 이제는 1년에 한 번 연락도 안 되는 사람들, 얼굴이 가물가물한 전화번호며 명함의 이름들, 당최 이름조차 떠오르지 않는 사진 속 얼굴들이 부지기수가 되고 말았다.

쌓여가는 일상용품에 대해서는 누구나 한 번쯤 ‘언제 정리 좀 해야 할 텐데’ 생각할 수 있다. 다만 그 언제가 과연 언제일지 발동이 걸릴 때만 남아있을 뿐이다. 그런데 정작 사람에 대한 정리는 별반 생각 없이 하루하루를 살기 쉽다. 그러다가 가깝다고 여겼던 사람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멀었던 사람이라도 돌연 단절이 되면 충격을 받는다. 연인이 이별을 통보할 수도, 옛 상사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을 수도 있다. 반면 소식이 끊겼던 친구가 연락해올 때처럼 즐거운 충격도 있다. 나쁘든 좋든 사람과의 관계에 좌우되기에 앞서 내 존재를 정립하고자 한다면 사람 정리야말로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설혹 정리한 끝에 혼자가 된다 할지라도 혼자일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야말로 진정 친밀한 관계를 맺을 수 있다지 않는가. 혼자의 시간을 고통스러워하기보다 즐길 수 있는 사람만이 누군가를 제대로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건 정리의 이치와도 일맥상통하는 듯하다. 일본에서 ‘정리의 마법사’로 통하는 곤도 마리에 씨는 얼마 전 국내 한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진짜 인생은 정리한 뒤 시작된다'면서 '인생은 살아가는 이 순간이 무엇보다 소중하기 때문에, 정리를 통해 과거를 처리하고 주변을 빛나는 물건으로 채워 지금 당신을 빛나게 하라'고 권고하고 있다.
 
‘언젠가’는 영원히 오지 않는다

나 자신도 물건 정리를 하고 나서야 사람 정리에 생각이 닿았다. 지난가을 마침내 발동이 걸려 두 달여 정리에 팔을 걷어붙인 결과 쌓인 물건들로 터져나갈 것 같았던 아파트에 여백이 생기게 됐다. 옷, 책, 세간 등 그간 엄두도 내지 못했던 더미들을 해치우고 나자 사기충천해 소소한 것들에까지 손을 댔다. CD, USB, 이메일 등의 정리는 쉬웠다. 이어 전화번호의 이름과 사진, 명함 등을 뒤져보기 시작했으나 간단한 듯하면서도 복잡한 게 사람 정리였다. 물건에 대한 가차 없는 취사선택이나 컴퓨터에서 삭제 ‘del’ 자판을 누르는 것과는 달랐다. 이름이나 얼굴들과 소통하던 때를 곰곰 떠올리느라 시간이 꽤 걸렸다.
 
‘그렇지 않아도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만날 수 있는 사람 수가 줄어간다는데 일부러 줄여?’ ‘늙어 체 머리 흔들 때 추억으로 살거리를 많이 남겨 놓아야 한다는데…’ ‘언제 다시 연락해 볼까?’ ‘행여 만나게 되지는 않을까?’ 이렇게 저렇게 보태지는 미련들이 시간을 더 끌었다. 정리의 마법사로부터 다음과 같은 지혜를 빌려와야 했다. '언젠가 쓸 것 같아 물건을 못 버린다는 그 ‘언젠가’는 영원히 오지 않는다, 물건 정리는 버릴 것이 아니라 남길 것을 고른다, 소중한 것을 더 소중히 하기 위한 작업이 정리다.' 그럼에도 ‘내가 뭐라고 누구를 정리한단 말인가, 이대로 그냥저냥 지내는 거지’하는 생각이 자꾸만 손을 멈칫하게 했다.
 
진짜 인생은 정리한 뒤 시작

일본의 저명한 마케팅 컨설턴트인 나카야마 마코토 씨는 ‘마흔에 꼭 만나야 할 사람 버려야 할 사람’이란 저서에서 다음 3단계로 사람을 정리하라고 일러준다. 1단계 버린다. 친분을 맺고 있는 사람 중 필요한 사람만을 찾는다. 2단계 고른다. 남은 사람 중에서 정말 필요한 사람만 고른다. 3단계 보강한다. 나의 부족한 부분을 찾아내고 이를 메워 줄 사람을 찾는다. 모두가 ‘나의 필요’에만 초점을 맞춘 단계들이다. 오직 내게 유익하고 그래서 필요한 인맥관리의 차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이를 먹어갈수록 여기서 한 단계 나아가 앞으로 삶의 끝까지 서로 희로애락을 나누고 싶은 이들부터 꼽아야 하지 않을까. 그러려면 나의 유익을 사람 정리의 우선적인 기준으로 삼아서는 안 될 것 같다. 상대도 나를 똑같이 그 기준에 세울 테니까 말이다. 내게 아무런 이익이 되지 않는 사람에게 어떻게 대하는가를 보면 그 인격을 가늠할 수 있다지 않는가. 친구 관계는 물론이고 업무상의 관계에서도 크게 벗어나지 않는 얘기인 것 같다. 내 손익을 따지기에 앞서 인간적인 감성이 통하는 업무 상대라면 당장은 아니더라도 기회가 닿을 때 도움을 주고 싶어진다. 고객의 불만제기에 직면했을 때도 회사나 고객의 손익을 재보며 실리적인 보상에 나서기보다는 진심 어린 사과가 더 효과를 발휘하는 마케팅으로 알려졌다.

긴 시간 끝에 드디어 정리를 마치고 나니 이제부터 이들을 정말 아끼며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절로 새로워졌다. 무엇보다 남은 인생을 함께할 친구들의 존재가 더욱 귀하고 각별해지는 것이었다. 나이 들어갈수록 친구밖에 없다던가. 이제 양력으로나 음력으로나 꼼짝없이 한 살 더 먹는구나 싶으니 더욱 그러했다.
 
친구들을 불러 소박한 점심을 샀다. 느닷없어들 하기에 생일을 핑계 대니 선물을 준비 못 했다며 미안해한다. '너희가 이미 생일선물'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친구는 한 사람이면 족하고, 두 사람이면 너무 많고, 세 사람은 불가능하다’는 말이 있다. 그러니 주저하지 말고 사람 정리를 해볼 일이다. 진짜 인생은 정리한 뒤 시작된다는 것, 물건이나 사람이나 다르지 않아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