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 스토리] 달려보면 비로소 알게되더라… 삶도 추억도 청바지도

나의 고향은 평안남도 강동군 능성리다. 평양에서 40리(16km) 떨어져 있었다. 집 앞에는 대동강으로 흘러가는 큰 냇가가 있었다. 학교를 다닐 때 다리를 건너면 멀리 돌아야 해서 대신, 가방 봇짐을 머리에 이고 대동강을 헤엄쳐 건너 학교를 다녔다. 이는 내 체력을 키워주었을 뿐 아니라 나중에 내가 달리기를 시작하게 된 계기가 됐다.

평범하고 평화로운 열일곱 살의 청소년기를 보내던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했고, 그 해 12월 4일 저녁 집에서도 폭탄 소리가 들렸다. 다음 날 새벽 5시쯤 친척이 찾아와 중공군의 개입으로 유엔군이 후퇴한다고 전해줬다. 부모님은 우리 형제들을 남쪽으로 잠시 떠나게 했다. 나와 동생은 그저 잠깐 며칠 피하면 될 거라 생각하고 "잠시 다녀오겠습니다"라고 인사를 드렸다. 그 말이 부모님과의 마지막 인사였다. 유년시절을 보냈던 고향 땅을 못 가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내 한(恨)은 이렇게 만들어졌다. 걸어서 남쪽으로 내려왔다. 충청남도 아산에 있던 수용소까지 가는 데 두 달이 걸렸다. 생존 자체가 힘들었다. 굶어 죽지 않기 위해 안 해본 일이 없었다.

이때마다 나는 대동강을 수영하던 때를 생각하곤 했다. 가족과 같이 고향에서 살았던 때가 사무치게 그리웠기 때문이다. 실제로 근처에 있는 강에서 수영한 적도 있었지만, 수영할 곳은 마땅치 않았다. 그래서 달리기를 시작했다. 건강을 위해 달린다는 생각은 없었다. 그냥 쉽게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시간이 날 때마다 가까운 곳에서 한두 시간씩 고향의 추억을 되살리며 달렸다.

1950년대 강원도 원주의 미군부대에서 일하면서 알게 된 동료가 있었다. 그는 당시 서울 평화시장에서 일을 하고 있었는데, 휴전이 된 뒤 대구에서 살던 내게 "피복공장이 돈이 된다더라"라며 평화시장에 대해 말해줬다. 1961년 서울로 무작정 상경해 평화시장에서 장사를 하면서 '제일피복'이라는 가게를 만들었다.

1960년대 평화시장은 이북(以北) 사람들로 넘쳐났다. 아무 기반도 없는 이북 사람들은 하루 벌어 하루를 먹고 살았다. 당시의 주된 상품은 미군부대에서 나온 바지에 염색을 한 옷이었다. 제대로 된 옷을 입은 사람은 별로 없던 당시, 일부는 외국에서 청바지를 사가지고 와서 입었다. 부의 상징이었다. 일반 사람들은 그걸 보고 푸른색 원단으로 바지를 만들어 청바지처럼 입고 다녔다. 나도 1970년부터 미군부대에서 버리는 단추, 지퍼 등과 당시 처음 국내에 나온 청바지용 원단을 이용해서 청바지를 만들기 시작했다. 뱅뱅 청바지의 시작이다. 당시 평화시장에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가게가 망했다.

평화시장에서도 나는 달렸다. 청계천이 콘크리트로 덮여 있지 않을 때는 천 주변을 뛰었고, 복개된 다음에는 위를 달렸다. 어차피 양복 입고 출퇴근을 하지 않았을 때이므로, 복장도 청바지든 뭐든 평상복 그대로였다. 주로 장사를 하지 않는 새벽녘이나 저녁 시간에 달렸다.

이때는 추억 때문에 뛰지는 않았다. 괴로워서 달렸다. '왜 옷이 안 팔릴까', '현금이 부족한데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이번 달 직원 월급은 어떻게 주나'…. 달리기를 시작하면 처음에는 이런 고민들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그러나 좀 더 지나면 몸이 힘들어서 괴로움이 잊혀지고, 잡념도 없어졌다. 달리고 난 뒤에는 머리가 맑아지고 뭔가 다른 각도의 해결 방법이 떠오르기도 했다.

80년대부터 뱅뱅을 본격적으로 브랜드화했다. 1983년에는 서울 강남구 도곡동에 5층짜리 뱅뱅사옥을 지었다. 지금은 주변에 높은 건물들이 제법 들어섰지만 당시에는 우리 회사보다 큰 건물이 거의 없었다. 그 때문에 사옥 근처 사거리는 그때부터 '뱅뱅사거리'로 불리기 시작했다.

해외에 출장을 가면 오전 9시부터 밤 10시까지 현장을 계속 돌아다닌다. 이럴 때도 나는 시간을 내서 근처를 달렸다. 골프나 다른 운동도 하지 않고 달리기만 했다. 가끔 골프를 왜 안 치느냐고 묻는 사람이 있는데, 나는 시간이 아까워 안 친다. 한번은 중국의 공장에 출장을 갔다가 아침에 바닷바람을 즐기며 직원들을 데리고 해안을 달렸다. 그런데 직원 한 명이 "그 실력이면 마라톤 대회에 나가도 될 것 같다"고 말을 했다. 실제로 2004년 3월 28일 LG화재(현 LIG화재)에서 주관하는 제2회 코리아 오픈 마라톤 대회에 참가했다. 그때가 일흔하나로, 참가자 중 최고령자였다.

아쉽게도 2006년 심장수술을 받은 뒤에는 의사가 달리기는 하지 못하게 했다. 그 이후로는 달리지는 않고 빠른 걸음으로 매일 걷는다. 한 달에 3~4번 가는 해외 출장은 멈추지 않고 있다.

열일곱 나이에 피란 내려오면서 사선(死線)을 넘었고, 창업하자마자 공장에 불이 났고, IMF외환위기 때는 매출이 5분의 1토막 났다. 이럴 때마다 어떻게든 살아남은 바탕은 달리면서 다진 체력과 정신력이 아니었을까 생각하곤 한다.

[청바지로 일어선 권종열 회장은…]

권종열(81) 뱅뱅어패럴 회장은 1950년 12월 평안남도에서 남한으로 걸어서 피란을 왔다. 미군 부대, 공장 등에서 일하다가 1961년 서울 평화시장에서 옷 장사를 시작했다. 맨 처음 세운 회사는 세 평 면적에 미싱을 한 대 놓은 제일피복이었다. 군복과 비슷한 모양의 '쫄쫄이'를 시작으로, 거의 모든 종류의 옷을 만들어 팔았다. 1970년부터 뱅뱅 청바지를 만들었는데, 당시 교복 자유화로 청바지 수요가 늘어나면서 회사가 커지기 시작했다. 1985년에는 회사도 '뱅뱅'으로 바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