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니어 에세이] 여자는 여자

미장원 문이 닫혀있다. 건너편 중년을 훌쩍 넘긴 세탁소 아저씨가 건너다보며 말을 하고픈 눈치다. 늘 그랬다. 툭하면 닫혀있는 미장원을 돌아설라치면 말 붙일 기회를 잡으려는 눈빛에 재빨리 계단을 내려오곤 했다. 오늘도 마찬가지로 세탁소 아저씨에게 잡히기 전에 후다닥 돌아서서 내려섰다.

늘 머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엊그제 파마를 했는데 이 또한 마음에 들지 않아 싹둑 자르려고 들렸는데 미장원 문이 굳게 잠겨있으니 난감했다. 어쩔까 잠시 망설이다 마트 뒤에 있는 미장원 문을 밀치고 들어섰다. 멋진 카페 같이 만들어 놓은 미장원에 손님이 없다. 머리를 뒤로 질끈 묶은 아줌마가 반색한다.

저녁에 식구들이 하나둘 들어오기 시작한다. 아무도 나에게 머리를 잘랐느냐고 물어보지 않는다. 긴 머리를 그것도 파마머리를 싹둑 생머리 단발로 잘랐는데 아무도 그 변화를 눈치채지 못한다. 모처럼 마음에 들게 잘린 내 머리에 한껏 들떴던 마음이 식구 한 명씩 들어설 때마다 바닥으로 가라앉는다.

아침까지 아무도 내 머리에 대해서 말하는 사람이 없다. 괜히 아침부터 심통을 부리다 출근길에 나섰다. 간밤에 비가 왔는지 도로가 젖어있다. 상쾌하다. 겨울이 겨울답지 않아 벌써 봄기운이 느껴진다. 상했던 마음이 조금씩 부풀어 오르기 시작한다. 가로수에서도 괜스레 봄 향기가 폴폴 나는 것 같다. 이건 바람 날 징조다.

머리를 잘라도 파마를 해도 아무도 모른다. 그뿐인가 아프다고 누워있는 사람을 보고 나갔어도 아무도 전화 한 통이 없다. 그런 날 늦게 집에 돌아와서도 밥 달란다. 내가 밥 푸는 직업인가 싶다. 그래도 아직은 엊그제 단골 옷가게 아줌마 말마따나 한 미모(?) 한다고 생각을 하는데 식구 중에는 아무도 그걸 인정하지 않는다. 아마 홀라당 벗고 댄스를 해도 모를 거다.

‘내가 바람나면 어떻게 할 거야?’ 어느 막장 드라마의 불륜 장면을 보다가 괜스레 한 번 물어본 말에 돌아온 답이 가관이다. ‘ 아~~ 그거? 가문의 영광이지.’ 이 얘기는 누가 당신 같이 쭈그렁 망태기가 된 할머니를 거들떠도 보겠느냐는 마음이 짙게 배 있다.

남자들이 간과하는 것이 있다. ‘오십, 육십이 넘은 여자가 바람이 나 봤자지 뭐’ 하는가 하면 ‘어떤 미친놈이 다 늙고 쭈글 거리는 내 여자에게 눈길이 머물겠는가.'라고 믿는 그 남자 자신도 한때 그 여자에게 눈이 멀어 미쳤던 적이 있었다는 사실을 잊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여자들이 갱년기를 지나면서 내가 나를 들여다보며 얼마나 많은 깨달음을 얻었는지 모르고 있다.

남편은 남편 인생, 자식은 자식 인생이 있는 것처럼, 내 인생은 나의 것이라는 것을, 갱년기의 혹독한 시기를 거치며 어느 순간 깨달은 여자가 한 번 바람이 나면 무섭게 돌변한다는 것을 왜 모를까 싶다. 아무리 삶에 찌들어 감정이 메말랐어도 봄바람이 살살 불어오는 날, 그 여자의 작은 변화 하나에도 관심을 가져주고 배려하고, 눈 맞추며 하는 얘기를 들어주면 그 메마른 가슴에도 무섭게 불이 붙는다는 것을 왜 모르는지 모르겠다.

한 번쯤은 돌아서서 기억해주면 좋겠다. 꽃다운 시절에 내 아내도 시집을 손에 들고 슬픈 영화를 보면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고, 낙엽이 굴러가는 것을 보고도 깔깔거리는 여자였다는 것을…. 마음속 깊이 숨겨둔 일기장에 내 아내가 무엇을 써 내려가는지, 아내가 흘리는 말 속에서 무엇을 원하는지 살펴보라는 것이다.

어느 화창한 봄날. 내 여자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주고 다독거리는 남자를 따라 내 여자가 봄바람 타고 나풀나풀 날아간 뒤에 땅을 치고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랴. 마음도 몸도 내게 묶어두기 위해선 눈멀던 시절로 한 번 돌아가 보는 것도 괜찮지 싶다. 그게 황혼의 행복을 잡는 비결이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