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치의 시대가 도래함에 따라 필기구가 차지하는 비중이 많이 줄었다. 그렇다고 우리 일상에서 필기구가 사라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만년필 같은 매력을 갖춘 ‘글 쓰는 도구’가 탄생하지 않는 한.
만년필은 졸업과 입학, 사회에 진출하는 새내기 등 뭔가 새로운 시작을 하는 이들에게 주던 대표적인 선물이었다. 시니어 세대치고 만년필 선물 한 번 안받아본 사람 있을까. 책상을 뒤져보면 예전에 쓰던 만년필이 서랍 한 귀퉁이에서 뒹굴고 있을지 모른다. 아니 어쩌면, 아끼는 마음에 어렸을 때 받았던 그대로 박스 안에 ‘고이 모셔 놓은 채’ 있을지도.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그 자리를 다른 물건들이 차지하기 시작했고, 주변에서 만년필을 사용하는 사람도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만년필은 그냥 그렇게 사라지는가 싶었는데, 스마트 기기가 위세를 떨치는 이즈음 다시 부활하고 있다. 주 구매층은 20~30대 라는 것이 매장 판매사원의 전언. 만년필과 친숙하지 않은 세대임에도 마니아층을 형성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만년필 동호회 ‘펜후드’의 회장이자 국내 유일의 만년필연구소 박종진 소장은 “똑같은 만년필이라도 사용하는 사람이 어떻게 길들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글씨를 쓰는 각도, 누르는 힘에 따라 펜촉 닳는 게 달라지는데 특히 잡는 방식이 특이한 사람이 쓰던 만년필은 다른 사람이 못 쓴다. 그래서 우리끼리는 만년필은 마누라와 같다고 한다. 절대 빌려주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단지 기록의 도구가 아니라 자신의 개성과 취향을 드러낼 수 있는 도구라는 점에서 매혹당할 수 밖에 없는 대상인 것이다.
지금의 만년필은 1883년 선보인 워터맨의 만년필에서 파생되었다. 잉크가 나오지 않는다거나 잉크가 왈칵 쏟아져 사용이 용이하지 않았던 당시, 이런 문제점을 해결한 사람이 바로 워터맨이었다. 펜촉을 지탱하면서 잉크를 펜 끝에 보내는 부품인 피드(feed)에 넓은 홈과 가는 홈을 넣어 잉크가 균일하게 흘러나오도록 한 것. 그러나 필기구에 대한 인류의 열망은 그보다 훨씬 오래 전부터다. 갈대, 깃펜을 이용해서 쓰고, 펜촉을 만드는 등 다양한 시도를 하며 필기구는 진화했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워터맨의 펜은 시작이 아닌 완성작에 가깝다 할 수 있다. 기록된 것으로 알려진 가장 오래된 만년필의 원형은 프랑스 루이 14세 때 왕립 엔지니어였던 니콜라스 바이온이 고안한 펜으로 1700년대에 이미 등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만년필이라고 할 수 있는 펜이 시작된 것은 1800년대 초 영국에서였다.
기술적 요소 뿐 아니라 형태도 업그레이드 되었음은 물론이다. 보석 장식, 어떤 대상에서 영감을 받거나 특별한 의미를 담아 만든 디자인 등 고가의 고급 만년필을 어렵지 않게 만나볼 수 있다. 그래서일까? 때로 만년필은 ‘성공한 남자의 상징물’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렇지만 수 백 수 천만 원을 호가하는 제품 외에 몇 만 원, 몇 십만 원의 실용적인 제품도 다양하게 있다. 어떤 것을 선택하든 상관없다. 다만, 인간의 감성을 간직한 도구 만년필, 이것을 사용하는 즐거움을 되찾아 보는 것은 어떨는지.
작가들은 어떤 만년필을 썼을까?
일제강점기에 소설가 이태준은 사용하던 만년필을 잃어버린 애틋한 마음을 수필에 담아낼 만큼 만년필 애호가였다. 그의 글에는 “물질, 한낱 조그만 한 물형에 일종의 애정을 폭로함은 스스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사실임엔 감출 필요야 없는 것이다. 나는 만년필을 퍽 사랑한다. 붓은 내 무기이기도 하려니와 아마 나는 글을 쓰지 않더라도 만년필은 다름없이 사랑했을는지 모른다. … 나는 다른 방면엔 박하더라도 만년필에만은 제법 흥청거렸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청록파 시인 박목월은 파커 45를, 시인 박두진은 1960년부터 10년간 나온 몽블랑 2디지트 시리즈 중 32를 사용했다.
현대 작가 중 소설가 박완서는 시조 시인 이영도 선생으로부터 받은 푸른색 파커 만년필을 사용했다고 한다. 1970년대 중반에서 1980년대 초반에 나온 작가의 주옥같은 글이 바로 파커 만년필의 끝에서 나온 글들. 소설가 박경리가 사용한 만년필은 몽블랑 149로, 통영의 박경리기념관에 실물이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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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스터스튁 1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