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니어 에세이] 길을 달리다가 만난 뜻밖의 즐거움

강물을 보러 가던 날 남종면의 하얀 언덕에서 잠시 걸음이 머물렀다. 내 호기심의 원형을 지닌 채 눈이 쌓인 남종면의 언덕에서 조선인이 지니고 있던 자유로움을 향한 삶과 꿈으로 남한강의 물줄기를 품고 있었다.

분원백자도요지라는 돌비석이 비탈진 언덕으로 나를 안내하였다. 그 언덕의 끝에 폐교를 리모델링한 자료박물관은 수장고의 이미지를 지니고 철화백자의 색을 닮아 그 모습 자체가 자료의 한 역할을 하고 있다. 그렇게 수없이 지나다닌 길이건만 왜 몰랐을까…. 모든 잊혀지는 것들은 무심함에서 연유한다는 사실을 또 한 번 깨달아 가고 있었다.

분원이란 '사옹원 분원 백자 번조소'를 가리키는 말이다. 사옹원(司饔院)이란 왕실과 궁궐의 음식 관련 업무를 관장하는 중앙관청의 명칭이다. 이 사옹원에서 사용하는 음식 그릇의 제작을 위한 도요지 백자번조소(燔造所)를 분원(分院)이라 부른다. 음식 이외에도 왕실 전용의 그릇인 어기(御器)를 전담하는 생산 기구를 별도로 두었다.
 
세종 연간 자기소 파악이 완료되자 연료와 원료의 수급, 제작 기술의 역량, 서울과의 운송의 편리함을 고려하여 경기도 광주에 국영 자기공장을 설치하여 남종면 금사리와 분원리를 포함한 6개 면 30개 리에 340여 개소의 가마터 유적이 남아 있다. 지금은 이천이 도요지로 유명세를 알리고 있으나 원래 조선 왕실에 납품되는 가마터는 남종면이 그 주요한 터전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일제시대에 지금의 이천으로 이전이 되었다고 한다. 백자의 도요지 남종면이나 청자의 도요지로 알려진 강진까지도 지형적으로 물길을 따라 형성이 되었으며 그릇을 운반하기 위한 운송 수단으로 배를 사용한 것이 그 지형의 선택 요소가 된 것이다.
 
2001년과 2002년에 걸쳐 발굴 조사된 분원리 가마터는 백자관 앞의 A 지구와 분원초등학교 진입로에 인접한 B 지구에서 4기의 가마와 공방터 그리고 온돌 시설이 확인되었다. 발견된 가마들은 동고서저(東高西低)의 자연 경사면을 따라 나란히 배치되어 있었으며 점토로 축조된 반지하식의 오름가마이다.
 

조선 시대 백자의 대토는 청자와 달리 카오링질이 많은 원료를 사용하여 강도와 경도가 상대적으로 청자에 비해 높다. 청자가 1,200도의 온도에서 완벽한 형태의 완성을 이루어 가는데 비하여 백토는 몇 번의 거름을 통하여 고운 입자의 흙으로 형태의 빚어짐을 이루어간다. 이러한 고운 흙의 성질로 하여 청자보다는 50도 높은 온도인 1,250도 이상의 온도에서 형태의 완성이 가능하다고 한다. 학자마다 온도의 정확도를 말하는 것이 다르기는 하지만, 대부분 1,250도 이상에서 1,350도가 한계선이다. 유약은 석회질이 많은 장석과 재를 섞어 사용하는데 중국과 우리나라는 사용하는 원료가 달라 색상도 다르다.
 
조선백자는 초기인 세종 연간까지 고려 백자와 유사한 연질의 백자가 제작되었으나 세조에서 예종 초년인 1470년대에 광주에 사옹원 분원이 설치되면서 왕실용의 분원 백자와 지방에서 만들어진 지방백자가 생산되었다. 이 시기 이후의 백자는 강도와 경도가 높으며 사용되는 대토의 질도 향상되었다.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청자가 고려에서 조선 초기까지 이어지고 있다면 백자는 조선 초기에서 시작되어 후기까지로 도자기의 형태로 시대가 지니고 있는 삶의 모습을 읽을 수 있음이다.
 
분원리의 백자 시대가 시작되면서 왕실과 사대부층의 고급 수요자에서 일반인에게로 그 영역이 확대되기 시작하여 모양과 크기가 다양해진다. 일상 그릇은 구연부가 곧게 올라가고 굽 안바닥을 깊게 파는 것이 특징으로 이전에 없던 새로운 모양의 그릇들이 등장하며 연적, 필통, 촛대, 등잔 같은 문방구와 생활용품들과 동물 형상과 자연물의 모습도 제작되기 시작한다.

분원리 후반부에는 제작지를 표시하는 분원(分院), 분(扮), 소비처인 운현궁을 뜻하는 운현(雲峴) 등을 청화로 써서 백자의 사용처를 알리기도 하였다. 조선 시대 전기를 통하여 모든 것을 수용할 것 같은 고요함의 백자 시대를 거쳐 새로운 시대의 모습을 지닌 청화백자가 그 모습을 드러낸다. 청화백자가 지니고 있는 푸른색의 염료들은 이슬람 문화권에서 실크로드를 통하여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로 수입되어온다. 조선 후기 왜란과 호란 시기에는 경제적인 문제로 인하여 청화백자를 만드는 주요 염료의 수입이 어려워지자 철화백자와 동화백자가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실제로 시대별로 구별되는 백자의 제작과정에서 나타나는 청화백자의 모습은 임란과 호란을 지내는 조선 중기에는 그 모습이 거의 없을 정도이다. 도자기의 색과 형태에도 시대적인 상황이 반영되어 있음이다.
 
초벌구이를 끝낸 도자기의 철화백자나 청화백자의 모습은, 오징어를 구우면 형태가 줄어들 듯이 애벌구이 후의 도자기 역시 뜨거운 온도에서 그 크기가 축소된다고 한다. 초벌구이와 애벌구이의 도자기 크기를 비교하면서 살아있는 생명체를 만나는 것 같은 흙의 성격을 알아간다.
 
청화백자 속에 그려진 용무늬에서 발톱의 숫자로 소장자의 신분을 알 수 있다. 발톱이 다섯 개인 용무늬 도자기는 황제의 소장품이고 네 개의 발톱은 임금의 소장품이며 청화백자를 지니고 싶어 했던 사대부 가의 주인들은 세 개의 발톱을 지닌 용무늬를 그려 넣어 신분을 구별하였다.
 
흙이 지니고 있는 성질로 하여 그 모습의 형태가 완성되어 가는 과정을 통하여 인간이 지니고 예술의 세계에서 만나는 또 다른 새로움의 시선이다. 가장 아름다운 형태의 도자기는 도공들이 왕실에 진상하지 않고 깨어버린다는 유물학자의 설명을 들은 적이 있다.

사람의 손으로 빚어가는 과정에서 더 이상 아름다운 도자기의 형태가 나타나지 못할 수도 있기에 가장 좋은 형태의 도자기는 진상하지 않는다는 설명이었으나 그 상황에서 이루어지는 형태가 지닌 완성도와 예술가의 영혼이 지니고 있는 형태의 추구이다.

완성작이란 오로지 자신의 판단과 감식에서 구별된다. 완성작을 만들었다고 만족하면 더 이상의 형태는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가마의 문이 열리어 나타나는 완성된 도자기를 바라보는 그 순간은 또 다른 형태로의 시작점이다. 그래서 완성작은 명사로서 안주하는 것이 아닌 움직임의 의미를 지닌 동사의 형태를 지니고 있다.
 
아름다운 도자기의 형태를 끊임없이 요구하는 왕실의 시선이 아닌 자신의 영혼을 향하여 절실하게 요구하고 있는 아름다움을 향한 파괴이다. 세상의 일반적인 시선이 아닌 도공의 영혼이 염원하는 순수의 결정체를 원하고 있었을 것이다. 도자기에 그려진 용의 모습으로 신분이 구별되던 신분계급의 사회에서 자신의 정신세계로 향하는 가치의 열정만이 지켜낼 수 있는 영혼의 자유로움이다.
 
아름다움의 완성을 위하여 파괴와 창조는 같은 맥락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덜 채워진 빈 달의 모습이 지니고 있는 시공의 세상처럼 무한의 가능성을 열망하고 있음이다. 아름다움을 끊임없이 추구하는 도공의 영혼이, 도자기라는 손끝의 예민함을 통한 정신의 세계로서만 가능한 열정의 무한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