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침없이 一劃… 바위는 의자가 되었네

"육중한 바위를 어쩜 이렇게 휜 것처럼 깎았죠?" 유명 패션디자이너 리드 크라코프가 커다란 손으로 스마트폰을 움켜쥐고 사진을 찍어댄다. 패션 브랜드 '코치'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였던 그는 뉴욕 화랑가에선 손꼽히는 미술품 컬렉터다. "눈물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아요." 뉴욕 메트로폴리탄박물관의 큐레이터 제인 애들린은 눈물 훔치는 시늉까지 한다.

지난달 27일 미국 뉴욕 첼시에 있는 프리드먼 벤다(Friedman Benda) 갤러리에서 열린 가구 디자이너 최병훈(62·홍익대 미대 교수) 개인전 '일필휘지(In one stroke)' 개막식. 털모자를 꾹꾹 눌러쓴 채 전시장에 들어선 뉴욕의 예술계 인사들은 하나같이 탄성을 터뜨렸다. 허드슨 강의 세찬 칼바람이 무색하게 전시장은 이내 열기로 데워졌다.

깜깜한 전시장 가운데 길이 3m의 검고 묵직한 돌이 뚝뚝 놓여 있다. 바라보기만 하는 조각이 아니다. 사람이 앉는 돌 벤치다. 최 교수는 돌·나무·철 같은 자연 소재로 아트 퍼니처(Art Furniture)를 만들어 국제적으로 이름을 알린 작가다. 아트 퍼니처란 가구 본연의 기능성에 예술성을 입혀 예술과 디자인의 경계를 넘나드는 장르. 최 교수는 미술 애호가인 프랑수아 앙리 피노 구찌 그룹 회장이 팬을 자처할 만큼 해외에서 유명하다. 현재 메트로폴리탄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기획전 '허영: 화장대의 예술(Vanities: Art of the dressing table)'에선 그가 돌로 만든 화장대가 전시 중이다.

반질반질 매끈한 검은 돌이 거친 황토색 바위와 붙어 있는 의자, 엿가락처럼 휜 돌 두 개가 이어진 듯한 벤치…. 최 교수의 돌 벤치는 묵언 수행하는 수도승과도 같은 모습으로 마음 울림을 준다. 놀라운 건 전혀 다른 돌덩이 두 개가 붙은 것 같지만 실은 한 덩어리란 사실. 주상절리(柱狀節理)를 이루는 3t 넘는 현무암 한 덩어리를 갈아 만들었다. 겉은 흙빛이나 안은 흑색인 인도네시아산 현무암을 가져와 일부만 갈고 일부는 표면을 그대로 남겼다.

"태고(太古)의 잔상(殘像)을 표현한 겁니다. 원시의 돌덩이가 우주가 생성될 무렵 자연의 에너지를 한껏 머금은 모습이지요." 중절모를 눌러쓴 최 교수가 말했다. 순간, 작가의 설명을 하나라도 놓치고 싶지 않은 듯 현지 관람객이 주위로 모여들었다. "명나라 화가 석도(石濤)가 '화어록(畵語錄)'에서 혼돈으로부터 만물이 나오는 과정을 '일획(一劃)'으로 규정했어요. 나는 억겁의 세월을 품은 바위로 기운생동의 에너지를 발산하는 일획의 찰나를 표현한 겁니다." '일필휘지(一筆揮之)'라는 제목이 여기서 왔다. "뭔가 관념적이고, 성찰적입니다. 이전엔 한 번도 본 적 없는 스타일이에요." 곁에서 뉴욕 아트디자인박물관(MAD) 글렌 애덤슨 디텍터가 눈을 반짝였다.

최 교수는 한국 디자인의 해외 진출에서 개척자 같은 존재다. 한국 가구 디자이너 최초로 1996년 프랑스 파리에서 개인전을 열었고, 18년 만에 다시 미국 주요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적잖은 나이의 그를 다시 도전에 임하도록 한 원동력은 이름 없는 해외 디자이너들이 국내에서 활개치는 상황이었다. "후학(後學)을 위해 평가절하된 우리의 디자인을 해외에 알리는 일, 그게 이번 전시의 목표입니다." 그의 중절모가 유달리 묵직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