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이라 하지만 어둠은 일찍 찾아들었다. 겨울답지 않게 비까지 내리니 온종일 어둠 속이다. 강물도 쉬고 있는지 비안개 속에 묻혀 보이지 않는다. 애써 흘러나오려는 눈물을 눈 한 번 질끈 감았다가 뜨며 눌러 버린다.
설 이튿날. 떨어지지 않는 발길로 친정어머니에게 갔다. 난 가급적 어떤 일이 생기지 않으면 친정 나들이는 하지 않는 편이다. 가도 곧바로 돌아서곤 했다. 밥 한 끼도 먹으려 들지 않는다. 못 됐다. 나도 안다. 그러나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 결혼한 이후 늘 해온 버릇대로 오늘도 두어 시간 만에 일어섰다. 밥 먹고 가라는 어머니 말에 갈 길이 바쁘다고 일어섰다. 무너져 내린다. 평생 쌓아 온 벽들이 오늘 와르르 무너지고 있었다.
예전 드라마 중에 ‘아들과 딸’이라는 드라마가 있었다. 내가 살아온 과정을 그 드라마가 그대로 보여 주고 있었다. 오빠는 드라마 속에 나오는 아들이었고 나는 드라마 속에 나오는 딸이었다. 무엇이든지 내가 하는 일은 어머니 마음에 들지 않았고 오빠가 하는 일은 모두 장하고 안쓰러운 게 내 어머니 마음이었다. 단 한 번도 내 얘기에 귀를 기울이거나 해 본 적 없었고 잘못한 일은 몇 배나 부풀려서 온 동네가 떠나가라 했다.
내가 기억하기엔 어머니가 나로 인해 환하게 웃는 모습은 단 한 차례로 기억된다. 오빠가 떨어진 대학에 내가 합격했을 때다. 그 날도 여느 때와 같이 어머니는 친구들과 놀고 계시다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합격자 발표에 자연스레 귀 기울이다 내 이름이 흘러나오자 환하게 웃었다.
그건 어쩌면 나 때문이 아니라 친구들에게 과시할 수 있는 일이 생겼기 때문이라 나는 믿고 있다. 왜냐면 책을 들고 있는 내 모습도 못마땅해 그것마저도 '대통령 마누라라도 될 거냐? 만날 책은 무슨...' 하고 트집을 잡던 어머니였으니.
세월이 흘러 결혼을 했다. 내 결혼은 그냥 몸만 갔고 오빠의 결혼식은 성대했다. 올케에게 해주는 예단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하다 못해 외제 비누까지 챙기는 어머니를 보면서 얼마나 슬펐는지 그 속은 아무도 모른다. 남편에게조차 반대하는 결혼을 강행하며 겪게 한 슬픔을 또다시 안겨 줄 수 없어 숨겨 왔다.
그런 대접을 받은 오빠와 올케는 지금 연이 끊긴 지 한참이나 됐고 밑에 남동생과 내가 그동안 부모님의 생활비를 대고 산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지금까지 어머닌 단 한 번도 그런 오빠를 나와 내 동생들이 듣는 데서 섭섭하다거나 욕하는 소릴 들어 본 적이 없다.
그런 어머니가 치매 증세를 나타냈다. 얼마 전에 내려가 찍은 고향 집 사진을 보여주며 말을 주고받았는데 십여 분 뒤 어머니가 묻는다. ‘우리 집 자리는 어떻게 됐니?’ 처음엔 어안이 벙벙했는데 그러고 보니 아까 ‘한열이 아버지는 어떻게 사느냐?’ 고 물으셨다. 분명 올 때마다 돌아가셨다 했는데 동생이 눈짓을 하며 고개를 가로젓는다. 내 어머니 머릿속의 지우개가 숨어 있다가 드디어 나타나 작동을 시작한 것이다.
기억과 망각 사이
멀어도 너무 멀다. 난 아직 어머니에 대한 분노가 가시지 않았는데…. 아니 어쩌면 세월이 갈수록 점점 더 또렷해지는데 내 어머닌 하나씩 망각의 세계로 던져놓고 있었다. 한때는 화해를 시도해 본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 시도가 얼마나 무의미한 가를 깨닫고는 다시 성벽을 높이 쌓아놓고 살았는데 도대체 어쩌라는 것인가. 그런데 나도 모르게 성벽들이 한둘 씩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안쓰럽다. 평생을 서슬 퍼렇던 양반이 초라한 모습의 치매 환자가 되어가고 있으니….
잠이 오지 않는다. 무섭다. 불을 끄고 누운 지 한 참이나 지났는데도 눈은 더 말똥거린다. 이 생각 저 생각에 밤새 뒤채이다 동틀 무렵 동생에게 문자를 넣었다. ‘아침에 엄마랑 병원에 다녀오렴. 치매검사 받고 약도 받고… 요즘은 치매약 드시면 괜찮다니까 꼭 다녀와서 연락해라.’ 동생도 잠들지 못하고 있는 탓이었을까 바로 ‘그래 알았어. 오늘 갔다 올게.’ 한다. 이제는 내가 다가가야 할 때이다 싶다. 그래 한 발 더 다가가자 싶어 길을 나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