널 보니 마음이 푸근

순백의 항아리 앞에 서니 세상 근심이 사라진다. 맑아서 아름답고, 둥글어서 덕스럽다. 2층부터 4층까지 백자호(白磁壺) 90점을 천천히 음미하다 보니 시간이 멎은듯 평정심이 찾아왔다. "백자 항아리에 표현된 원(圓)의 어진 맛은 그 흰 바탕색과 아울러 너무나 욕심이 없고 너무나 순정적이어서 마치 인간이 지닌 가식 없는 어진 마음의 본바탕을 보는 듯한 느낌이다"라고 한 혜곡(兮谷) 최순우(1916~ 1984) 말 그대로다.

성보문화재단 호림박물관(관장 오윤선)이 서울 강남 신사분관에서 13일 개막하는 '백자호-너그러운 형태에 담긴 하얀 빛깔'전(展)이다.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백자 중에서 항아리 기형만을 엄선해 선보이는 자리. 박물관이 소장한 최상급 순백자호(純白磁壺) 90점이 1차로 전시장에 나왔다.

백자 항아리의 단아하면서도 넉넉한 형태에 투영된 여러 층위의 하얀 빛깔을 감상할 수 있다. 조선왕조 500년 모든 시기에 걸쳐 제작된 백자호는 형태에 따라 입호(立壺)와 원호(圓壺·달항아리)로 나뉜다. 입호는 떡 벌어진 어깨에 아래로 갈수록 좁아지는 형태. 2층 전시실에선 '순백의 강건한 멋'을 주제로 풍만하고 남성적인 입호를 전시했다.

독립 공간에 전시한 18세기 백자 대호(大壺)는 이번 전시의 백미다. 3면 거울에 비친 대호의 여러 형태가 감상 포인트. 조선 왕실의 연향에서 사용된 큰 항아리의 웅장한 자태에서 발산하는 흰빛 기운이 감탄을 자아낸다. 박준영 학예연구사는 "이번 전시를 통해 달항아리에 비해 예술적 가치를 주목받지 못한 입호의 조형미를 부각하고자 했다"고 했다.

3층에선 '순백의 온화한 둥근 맛'을 주제로 조선백자의 백미로 꼽히는 18세기 달항아리를 소개한다. 달항아리의 비밀은 가운데 이음매에 있다. 예전의 기술로는 높이가 40㎝ 넘는 큰 항아리를 물레로 뽑아 올릴 수 없었다. 젖은 태토(胎土)가 주저앉아 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발을 포개는 발상의 전환으로 반씩 빚어 이어붙이는 지혜를 발휘했다. 약간 이지러진, 어리숙한 둥근 형태가 멋스럽다. 수화(樹話) 김환기 화백은 백자 달항아리를 성북동 집의 정원에 놓고 "달 뜬다"며 아이처럼 좋아했다고 한다.

4층에선 조선 초기의 순백자호를 전시했다. 주제는 '순백과 절제의 미'. 15~16세기는 조선백자가 지향한 순백이 완성되는 시기이자 조형적 측면에서도 최절정에 달한 시기다. 오윤선 관장은 "순백의 빛깔과 절제된 형태미는 성리학적 이념에 기반을 둔 조선 왕조의 미의식과 통한다"고 했다.

4층까지 관람하고 나면, 자연스레 발길을 돌려 2층부터 한 바퀴 더 돌게 된다. 조선 초기의 설백색(雪白色)에서 임진왜란 이후 17세기에는 좋은 흙을 구하기가 어려워 회백색으로 변했다가, 18세기 달항아리에 이르러서는 우윳빛을 띠며 좀 더 따뜻해지는 시기별 빛깔의 변화를 포착할 수 있다. 6월 21일까지. 6월 26일부터 개최되는 2차 전시에서는 청화(靑畵)·철화(鐵畵) 백자호 90점을 전시한다. 관람료 8000원. (02)541-35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