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니어 에세이] 늙어도 젊은 대화

“사랑해보고싶어.”

한 덩어리로 쓰인 이 문장을 어떻게 읽으시렵니까? 하는 질문을 받는다면 문장은 하나여도 답은 두 가지로 갈라지게 될 듯하다. 지금 사랑에 빠진 사람은 “사랑해, 보고 싶어”로, 홀로 외로운 사람은 “사랑, 해보고 싶어”일 것 같다. 움직임 없는 글자들도 이렇게 달라지니 목소리의 톤과 억양, 표정과 눈빛 등 온갖 감정이 스며있는 말은 같은 단어라도 얼마나 달라질까. 말하고 듣고, 다시 말하고 듣는 사이 소통의 틈은 또 얼마나 벌어지게 될까.
 
서로 꺼내고 있는 단어는 똑같은 순간에도 ‘이건 대화가 아닌데…’ 싶을 때가 종종 있다. 얼마 전 한 지인과 음악회를 갔을 때도 그랬다. 음악회가 끝나고 나니 밤 10시가 넘었기에 “오늘 꼭두새벽에 일어난 바람에 피곤하다.”는 말이 절로 나왔다. 그랬더니 그는 “나는 새벽에 일어나면 이것저것 하는 일이 여러 가지”라면서 그 일들을 죽 늘어놓았다.
 

같은 새벽을 말하고 있어도 나는 피곤이, 그는 하는 일들이 주제이니 대화가 이어지지 않았다. “많이 피곤하겠다. 집에 바로 들어가 푹 자야겠구나.” 말했더라면 “언제쯤 애프터 하자.”며 다시 자리를 마련하려는 훈훈한 대화가 계속될 수 있었을 것 같다.
 
다른 지인과의 며칠 전 대화도 비슷했다. “어제 어떤 행사에 갔는데 네가 좋아하는 내용이라 네 생각이 많이 났다.”고 전화를 했다. 그랬더니 “어제 나도 어디 다녀왔다.”며 그 얘기로 일관하는 것이었다. “그러니? 내 생각해줘서 고맙다. 함께 갔더라면 좋았을 텐데. 언제 기회 되면 또 가자.”란 반응으로 이어졌더라면 어땠을까.
 
그러고 나서 어디 다녀온 얘기를 했다면 아마도 “거긴 어땠니?” 물어보며 대화가 계속될 수 있었으리라. 건너온 말을 잘 듣고 어떤 감정에서 말하는 건지 헤아려 다시 말을 건네는 것이야말로 대화의 시작일진데, 나 또한 그렇게 대화하는지 곰곰 돌아보게 된다. 
 
서로 독백하는 대화

같은 어제, 같은 새벽을 말한다 해서 다 대화가 되고 있는 건 아닌 듯하다. 각자 자기 할 말만 한다면 대화가 아닌 대화형 독백, 독백형 대화라고나 할까. 부부 사이라고 다르지 않다. “오늘 힘든 일을 했더니 허리가 끊어진다.” 아내가 말하니 남편은 “오늘 팔다리에 머리까지 아프다.”고 한다.
 
아내가 바라기는 빈말일지언정 “힘들었겠구나. 안마라도 해줄까?” 쯤 일터이다. 그러면 “고마워. 당신은 오늘 어땠어?” 물을 수 있고, 남편이 몇 술을 더 뜨더라도 아내는 들어줄 마음이 된다. 그렇지 않으니 사소한데 서부터 아내의 서운함은 쌓이고 어떤 계기에 우르르 일어날지 모를 일이다.
 
부부싸움이 잦은 한 남편이 그 해법을 묻고자 은사를 찾았다. “아내가 말하는 것에 귀를 기울여라.”는 조언을 듣고 그대로 하니 정말 싸움이 사라졌다. 내친김에 신혼 분위기로 되돌아갈 방도까지 구하자 은사는 이렇게 일렀다. “아내가 말하지 않는 것에 귀를 기울여라.” 그 마음까지도 읽으란 얘기다.
 
최근 조사에서 우리 부부 3쌍 중 1쌍이 하루 30분도 대화하지 않으며, 그 첫 번째 요인은 시간 부족 때문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말하는 것은 물론 그 너머 마음까지 알아채 반응하지 못하는 독백형이라면 긴 시간 대화인들 무슨 소용일까. 말없이 어깨 한번 다독여주는 몇 초의 시간보다도 나을 게 없으리라.
 
아이들의 대화는 독백형 일색이다. “나는 어제 뭐 먹었다.”하면 “나도 어제 뭐 먹었다.”이고, “아빠가 뭐 사줬다.”하면 “우리 아빠도 뭐 사준댔다.” 식이다. 한나절을 함께 놀며 어제와 아빠라는 같은 단어를 말하고 있지만, 제각각의 이야기일 뿐이다. 그런데 할머니 할아버지의 대화에서도 같은 모습을 많이 본다.
 
마주 보며 말하고는 있어도 자식 자랑, 사위 자랑을 서로 독백하는 식이다. 상대의 말을 관심 있게 듣고 물어보거나 맞장구치며 이어가는 대화와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바로 그런 대화를 나 역시 지인과 나누었을 때, 자조인지 자위인지 문득 ‘우리가 늙어가고 있는가 보다.’ 싶어졌다. 늙는다고 다 그런 건 절대 아니건만.
 
사뿐히 오가는 탁구공

지금 대화 중인 사람 외엔 이 세상에 아무도 없는 듯 귀 기울이는 게 최고의 강점이었다는 마더 테레사의 주름 깊은 얼굴이 떠오른다. ‘대화할 때는 다른 사람을 깎아내리거나 제치지 말고 가장 좋은 점을 이끌어내는 것을 목표로 삼으라’는 사도 바울의 메시지도 진정 새겨야 할 권면이 아닐 수 없다.
 
상대방이 아닌 나의 자랑으로만 귀결되는 일명 ‘깔때기’ 대화가 특히 나이 들어갈수록 얼마나 잦아지기 쉽던가. 마더 테레사나 사도 바울식의 대화라면 아마도 청춘남녀의 연애 시절에야말로 최고조에 달할 것 같다. 그러니 젊고자 한다면 우선 대화법부터 바꿔야 하지 않을까.
 
늙어서 자신의 오래된 이야기만 길게 되풀이하면 아무도 듣지 않으려 하거니와 ‘보수 골통’으로 외면 당하기에 십상이다. 그래서 보수와 진보 논조 양쪽의 책이며 영화, 신문 등을 두루 본다는 어르신도 있다. 대화법은 물론 그 내용 또한 균형적으로 바꿔서 세대 차를 넘는 열린 대화를 지향하려는 노력이다.
 
그런가 하면, 한쪽 귀는 막고 자기 견해만 주장하는 청년도 있다. 과연 누가 젊은이인가? 나이를 잊게 하는 젊은 대화는 네트 위를 사뿐히 오가는 탁구공을 연상케 한다. 탁구 채와 탁구대를 튕기는 탁구공의 소리처럼 경쾌한 쌍방향 소통이다.
 
얼마 전 뉴욕의 심장부인 타임스스퀘어에서 작은 소동이 벌어졌다는 신문기사를 보았다. 위·아래 2개의 대형 스크린에 카메라까지 장착된 현대자동차의 쌍방향 옥외 광고판 때문이었다. 카메라가 행인들을 실시간으로 찍어 위쪽 스크린에 투사하면 가수 싸이의 얼굴이나 현대차 속에 탑승한 모습 등으로 합성돼 아래쪽 스크린에 나타난다. 여기에 얼굴이 잘 나올 수 있는 가운데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결국, 경찰이 출동해 바리케이드를 치고 줄 세우는 일까지 발생한 것이었다.
 
광고조차 이렇게 쌍방향 소통에 나서려는 이제, 사뿐히 오가는 탁구공과 같은 젊은 대화가 아쉽다. 말해를 맞아 돌고 있는 시중 유머대로 말이 제일 싫어한다는 말꼬리 잡기, 말허리 잡기, 말을 이리저리 돌리기, 말 바꾸기, 말머리 돌리기가 없는 대화다. TV 드라마 ‘따뜻한 말 한마디’란 제목 그대로 온기가 있는 대화다. 말하는 것에 귀를 기울이고, 말하지 않는 것까지 헤아리는 대화라면 죽어버린 신혼 분위기마저 되살린다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