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니어 에세이] 모자를 쓴 여인

매주 화요일 저녁이면 집 가까이 있는 도서관으로 향한다. 평생교육프로그램으로 개설된 인문학 강좌에서 중국 역사를 공부하기 위해서다. 정년퇴직한 대학교수로부터 수준 높은 강의를 들을 수 있는 이 반에는 연세가 지긋한 어르신들과 중년층 등 30명 정도가 출석하고 있다.
 
비바람이 치고 기온이 뚝 떨어진 날에도 결석이 별로 없어 담당 교수를 뿌듯하게 만들 만큼 학생들의 만학 열기는 뜨겁기만 하다. 이런 반이 보통 그렇듯이 대부분 한번 앉은 자리를 고수하는 편이라 전후좌우 자리의 분들과는 곧 친구처럼 인사를 나누는 사이가 됐다.
 
“어머, 모자가 참 멋있으시네요!” 옆자리의 여자에겐 내가 먼저 인사를 텄다. 이름조차 아직 모르지만, 동년배인 듯 뵈는 그녀의 모자에 느낌표가 절로 나오기도 했다. 마치 챙을 없앤 갓과 같은 모양새의 모자가 옷과 일습을 이루며 그녀와 썩 잘 어울렸다.
 
“제가 만든 거예요. 실은 암 수술을 해서….” 치료하느라 머리카락이 빠져서 만들어 쓰게 됐다고 묻지 않은 얘기까지 털어놓는다. 앞자리에서 그 얘길 들었는지 역시 비슷해 뵈는 연배의 여자가 뒤를 돌아보며 대화에 끼었다. 그녀도 모자를 쓰고 있었다. “저도 암 수술로 인해 모자를 쓰는 건데…. 어떤 암이었어요? 저는 유방암.” “아, 그러셨구나. 저는 대장암이었어요.”
 
그러고는 두 여자가 동시에 나를 쳐다보는 것이었다. 나 또한 모자를 쓰고 있었던 까닭이었다. “아니, 저는 워낙 머리숱이 없는데다 요즘 낙엽처럼 머리카락이 우수수 빠지는 바람에 머릿속이 휑해 보일까 봐서요. 모자를 쓰니까 무엇보다 머리 모양에 신경 쓰지 않아도 돼서 좋네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두 사람이 이구동성으로 모자가 잘 어울린다고 칭찬한다. 빈말일지라도 고마웠다. 아니, 병치레 없이 모자를 쓴다는 사실에 순간 감사했다. 강의가 시작돼서 대화는 중단됐지만, 수업 내내 ‘대단한 여자들이구나’ 하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암을 이겨내고서 이런 공부를 하러 다니다니….’

옆자리의 여자와는 강의 후 도서관 벤치에 앉아 이야기를 이어갔다. 남편을 일찍이 사별하고 두 아들과 산다는 그녀는 이제 배우고 싶은 것, 다 찾아다니며 배우고자 강의에 참석한다고 했다. 엎어지면 코 닿을만한 거리에서 오는 나와는 달리 그녀는 인근의 의왕시에서 차를 몰고 달려온다.
 
앞서 주역에 대해 공부를 했는가 하면 커피에 이어 다도도 배우고 있고, 동대문에서 천을 끊어다 옷 만들기도 즐긴단다. 매주 한 번 같은 책상에서 공부하기를 두 달여 됐다는 인연만으로 서로의 삶을 열어 보이자니 금세 밤이 깊어졌다. 다음의 대화를 기약하면서 “우리가 나이를 먹긴 먹었나 보다”며 함께 웃었다. 낯선 이와도 스스럼없이 말을 섞는 것이 나이 들어가는 징조 가운데 하나라지 않던가.
 
하기야 모자도 내겐 30년 직장생활을 끝내고서야 써볼 엄두를 낸 나이의 산물이다. 운동이나 나들이할 때 야구모자며 등산모자가 고작이었는데, 어디로 외출하든 모자를 쓰게 된 것이다. 그러고 보니 전철 경로석의 어르신들은 남녀 가릴 것 없이 거의 다 모자를 쓰신 모습들이고, 모자를 즐기는 지인들도 꽤 손꼽힌다.
 
별로 관심 없던 모자가 나의 애용품이 되면서부터 갑자기 눈에 들어와서만은 아닌 듯하다. 나이와 함께 친해지는 게 모자인 것은 분명하다. 햇빛이나 느닷없는 가랑비는 물론이고 점점 적어지는 머리숱을 가려주는데다 추울 때는 보온도 되니 실버에겐 뺄 수 없는 패션의 완성품이 아닌가 싶다.
 
그만큼 어울리는 모자를 쓰는 게 중요한 것 같다. 나이 들며 대접받는 비결로 일컬어지는 7가지 ‘Up’ 중에서도 우선순위에 드는 게 잘 갖춰 입으라는 ‘Dress Up’이건만, 모자가 오히려 ‘Down’ 시키는 결정타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한 선배의 경우가 그러했다.
 
몸집과 얼굴이 크고 둥근 편인데 챙의 폭도 좁고 산의 높이도 낮은 모자를 얹으니 마치 눈사람 같아 보였지만 어찌 말해줄 도리가 없었다. 그런데 한번은 챙과 산이 풍성한 모자를 썼기에 이때다 싶어 “여태껏 보았던 모자를 쓴 여인 중에 가장 멋진 모습”이라고 찬사를 퍼부었다. 앞으로 그런 유의 모자만 골라 쓰시라는 압력을 넣은 셈이다.
 
실버 공식모자?

나 또한 선배처럼 자신도 모르게 어울리지 않는 모자를 쓸 수 있어서 패션 감각이 세련된 딸 아들에게 모자 평을 청하곤 한다. 항시 그럴 필요도 없이 인터넷의 모자 쇼핑몰을 통해 얻은 조언이라면 전신 거울에 모자를 쓴 자기 모습을 비쳐 보란 것이다. 흘낏도 아닌 한참을 침착하게 관찰해야만 자칫 모자는 멋있는데 그걸 쓴 사람은 그렇지 않아 뵈는 불상사를 막을 수 있다고 한다.
 
또한, 달걀형 얼굴이면 어느 스타일이건 좋고, 둥근형이나 네모형은 풍성한 산에 적당한 챙이 있는 것을, 길고 야윈 얼굴은 왜소해 보이게 하는 요란한 모자 대신 산이 낮고 뾰쪽하며 챙의 폭이 적당한 것을 쓰라고 권한다. 

그래도 여자들은 모자를 다양하게 쓰고 다니는 편이지만 남자들, 특히 어르신들은 그렇지 않다. 챙이 앞쪽으로 조금 나와 있고 위는 납작한 바로 ‘도리우찌’라고들 부르는 모자를 너나없이 쓰신다. 영국에서는 사냥할 때 써서 ‘헌팅캡’이라 했다는데 일본에 들어오면서 모자의 챙이 새의 부리처럼 생겼다 하여 바뀐 이름이라고 한다.
 
일제강점기 일본 형사들과 한국인 앞잡이들이 많이 쓴데다, 검은색인 경우는 벗어 놓으면 개똥 무더기처럼 보이기도 했거니와 개똥같은 인간들이 쓰고 다닌다 하여 ‘개똥모자’라고도 불렀단다. 그랬던 것이 어쩌다 실버의 공식모자처럼 됐을까? 요즘에는 멋쟁이 대학생들도 더러 쓰고, 나 또한 아들이 선물한 덕에 헌팅캡족이 됐고 보면 이 모자엔 알 수 없는 매력이 숨겨져 있는 모양이다.
 
정신적으로 상류층을 지향하는 게 모자라고도 한다. 이왕이면 멋진 지향이 되도록 어울리게 써야겠지만 정신 이전에 신체적, 물질적 어려움이 없는 가운데 쓸 수 있다면 어떤 모양인들 기실 뭐 그리 대수이겠는가. 가까이는 암 치료 후 모자가 필요하게 된 학우들부터, 멀리는 저체온증과 폐렴에서 생명을 지키기 위해 털모자가 절실한 아프리카의 신생아들도 있다.
 
앙리 마티스가 남긴 인상주의 명작 ‘모자를 쓴 여인’ 이면에는 모자를 만들어 팔아 가계를 유지해야했던 그의 아내가 있다. 아직은 쌀쌀한 요즘, 늘 쓰고 다니는 모자의 따뜻함에 익숙해지곤 한다. 그러나 내게 주어진 현재의 감사함에 익숙해지지는 말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