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방울 소리가 내 속에서 곰삭기만을 기다렸지

"임방울의 소리엔 촉기(觸氣)가 들어있지요."

소설가 한승원(75)이 눈을 지그시 감으며 명창(名唱) 임방울의 판소리를 되새겼다. 한승원은 임방울의 삶과 예술을 그린 장편소설 '사랑아, 피를 토하라'(박하 출판사)를 이번 주에 낸다. "임방울 소리가 내 속에서 곰삭기를 기다리며 50여년을 보내고 나서야 쓴 소설"이라고 한다. 한승원을 광주광역시에 있는 임방울국악진흥재단의 기념관에서 만났다.

한승원이 말한 임방울 소리의 '촉기'는 '가슴을 건드리는 기운'을 뜻한다. 김영랑 시인이 임방울 소리의 맛을 가리키며 한 말이다. "김영랑은 서정주 시인이 찾아오자 유성기로 임방울 음반을 틀어주곤 '촉기가 있는 소리'라고 했어요. 서정주 선생이 서라벌예대에서 우리에게 시를 가르칠 때 그 이야기를 들려줬지요." 한승원은 김영랑의 시 '모란이 피기까지는'에서 '촉기'를 느꼈다고 했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둘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슬픔은 슬픔인데 찬란하다니…. 이런 모순어법이 독자의 마음속에 일으키는 울림이 '촉기'가 아니겠는가"라는 것이다.

임방울은 연인이었던 기생 김산호주(金珊瑚珠)가 병으로 세상을 뜨자 즉흥적으로 단가(短歌)를 지었다. "앞산도 첩첩하고 뒷산도 첩첩한디 혼은 어디로 행하신가. 황천이 어디라고 그리 쉽게 가려는가. 그리 쉽게 가려거든 당초에 나오지를 말았거나…." 한승원은 임방울이 내뱉은 소리를 '살아 꿈틀거리는 구슬프고 으스스한 바람 한 줄기'라고 묘사했다. '바람의 한 가닥은 먹구름 낀 하늘로 향했고, 다른 한 줄기는 이 산 저 산의 골짜기와 등성이의 숲 속으로 흘러들었다'고 했다. "내가 어렸을 때 고향(전남 장흥)엔 각시가 일찍 죽어서 미쳐버린 사내가 있었어요. 그 사내가 진달래꽃을 꺾어다가 각시 무덤을 꽃밭으로 꾸몄어요. 그는 '앞산도 첩첩하고'라며 노래를 불렀어요. 그 구슬픈 소리가 내 가슴을 울렸기에 보리밭 언덕에서 넋을 놓고 쳐다보곤 했어요."

한승원 소설은 임방울 평전을 지향하진 않는다. "사실성을 추구하는 평전과 달리 임방울 소리의 신화성(神話性)을 그리려고 했어요. 임방울의 일화에 상상력을 덧씌웠고, 몇몇 실존 인물은 일부러 가명을 써서 허구(虛構)를 강조했어요." 소설의 도입부는 임방울 탄생 설화다. 초가을 달밤에 갈대밭 속에서 남녀가 몸을 합친다. 여자는 달빛을 받아들이며 "아따 오메! 뭔 달이 저리 징그럽게 환하다요?"라고 속삭인다. 여자가 눈을 뜨니 모든 게 꿈이었다. 여자는 이듬해 초여름에 사내아이를 낳는다. '아이의 울음소리가 하늘의 악기 소리처럼 향맑았고, 쨍쟁 울리면서 하늘로 차올라가고 멀리멀리 퍼지곤 했다.'

한승원은 "임방울은 일제강점기와 6·25를 겪었다가 5·16 직전에 무대에서 쓰러졌지요"라며 "그의 생애는 우리 현대사의 격동기를 산 예술가의 초상"이라고 했다. 6·25 때 임방울은 피란을 가다가 인민군에게 붙잡혔다.

그는 '쑥대머리'를 불러 진짜 임방울임을 입증해 풀려났다. 자유당 정권 말기엔 일본 공연을 갔다가 우연히 조총련 관계자들을 만났다. 그는 귀국한 뒤 경찰에 끌려가 '조총련 지령을 받은 간첩'으로 몰려 모진 고문을 당해야 했다. 한승원은 "임방울이 고문 후유증으로 세상을 떴다고 봐요"라며 "법 없이도 살아갈 예술가를 권력이 죽인 거지요"라고 혀를 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