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 스토리] 실적없이 한해 보냈을 때, 중개商이 따라준 와인 한잔…

거제도의 옥포만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옥녀봉에 오르면 늘 감회가 새롭다. 작은 어촌을 끼고 있던 옥포만에 대우조선해양 옥포조선소가 자리 잡은 것은 1981년이다. 내가 대우조선해양(당시 대우조선)에 입사한 바로 다음 해다. 그동안 옥포조선소가 세계 조선해양산업의 중심지로 거듭나는 과정을 지켜볼 수 있었던 것은 한마디로 행운이었다.

개인적으로 지난 30여년은 희로애락(喜怒哀樂)으로 점철된 여정이었다. 풋내기 신입 사원에서 사장이 되기까지 많은 사람을 만나면서, 최고의 비즈니스는 돈독한 우정에서 출발한다는 깨달음을 얻게 됐다. 특히 내 경우엔 사업 상대와 좋은 우정을 쌓는 데 와인이 중요한 계기가 되곤 했다. 와인은 문화적 차이를 넘어 서로 마음을 털어놓도록 만들어 비즈니스의 성공을 돕는 묘한 힘을 가진, '우정의 묘약'인 것이다.

나와 와인의 인연은 영국 런던 주재원 시절 처음 시작됐다. 1991년 봄 초임 차장 직급으로 대우조선의 런던사무소 대표로 부임했을 땐 막막했다. 기존 고객도 없고 기댈 만한 영업망도 거의 없던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대우조선은 당시 세계 선박 시장의 가장 큰손인 그리스는 물론 컨테이너선 최대 발주국으로 부상하던 독일로부터 수주 실적이 단 한 건도 없었다. 그 어려운 시기에 내 인생과 회사에 전환점을 마련한 두 인물과 와인을 운명처럼 만났다.

실적 없이 한 해가 저물던 1991년 말 '일단 부딪히고 보자'는 생각으로 런던에 있는 대형 선박 중개 회사의 휴 매코이(McCoy) 회장에게 편지를 썼다. '한국에선 새해 초에 훌륭한 분을 찾아뵙고 덕담과 조언을 듣는다'는 이유를 들어 막무가내로 면담을 신청했다.

궁즉통(窮則通)이라고 할까. 회신이 올 것이라는 기대를 하지 않고 있었는데 1992년 새해 벽두 매코이 회장으로부터 '점심을 함께 먹자'는 연락이 왔다. 그는 회사 이사회 회의실에 차려진 점심 식사 자리에 '소비뇽 블랑' 품종의 '클라우디 베이'〈사진〉를 내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와인에 대해선 전혀 지식이 없던 내게도 상큼한 꽃향기가 인상적인 와인이었다.

매코이 회장은 "이 와인이 비싸진 않지만 맛은 손색이 없는 좋은 가치(good value)의 와인"이라면서 "당신 회사도 '가격 대비 가치 있는 배'를 만들어 보라"고 조언했다. 그는 이후 우리 회사에 20여년 동안 5조원어치 이상 선박을 발주한 그리스 최대 선박왕인 존 안젤리코시스(Angelicoussis) 회장을 소개시켜 주었다.

막막한 순간에 빛을 밝혀준 클라우디 베이는 그날 이후 소중한 분과 친분을 쌓는 자리에 내놓는 나의 애호 와인이 됐다. 우리 회사의 선박 명명식 행사에 사용되는 와인이 된 것은 물론, 귀한 손님에게 제공되는 하우스 와인으로도 자리매김했다.

매코이 회장과 만남에서 자신감을 얻은 이후 경쟁사의 거래를 돕고 있던 독일 선박 중개회사를 무작정 찾아갔다. 창립자 발터 히네베르크(Hinneberg)씨와 2세 가족으로만 이뤄진 소규모 중개회사였지만 컨테이너선 분야에선 세계적으로 이름난 회사였다. 첫 만남 이후 계속 인연을 이어가던 어느 여름날, 은퇴 준비 중이던 히네베르크씨가 저녁 초대를 했다. 엘베 강이 내려다보이는 함부르크 외곽 언덕 위에 자리 잡은 자택에선 창문 너머로 컨테이너 박스를 가득 실은 배들이 부지런히 오가는 모습이 보였다.

저녁이 차려진 식탁에 앉고 보니 내가 태어난 해에 담근 1955년 프랑스산 와인이 준비돼 있었다. 초대받은 사람에 대한 최고의 배려였다. 내가 태어난 해에 만들어진 와인을 마주하고 보니 적지 않은 감동이 밀려왔다. 식사가 끝나갈 무렵 히네베르크씨는 내게 짧지만 강렬한 한마디를 건넸다.

"젊은이(young man), 앞으로 살아가는 데 세 가지가 중요할 걸세. 지식, 네트워크, 행운이라네. 지식과 네트워크는 부단한 노력을 필요로 하지. 행운은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준비 없인 가질 수 없네." 나중에 알고 보니 히네베르크씨는 몇십년 후 식탁에 내놓을 것을 고려해 매년 일정량의 와인을 구입해 왔다고 한다. 그 와인들은 아마 여러 사람에게 진한 감동을 선사했을 것이다.

조선사의 경영은 그야말로 배를 타고 거친 바다를 항해하는 것과 같다. 흔히 호황은 짧고 불황은 길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시황의 부침이 크기 때문이다. 상담 시작에서 계약 성사까지 몇 년이 걸리기도 한다. 당연히 승자보다 패자가 훨씬 많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연이은 승부 속에서도 즐거움과 낭만이 있었던 것은 '우정의 묘약', 와인이 있었기 때문이다. 경영도, 사업도 결국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것이라 믿는다. 그래서 'In Vino Veritas!'(와인 속에 진리가 있다) 고 하지 않았던가?


[현장 중시하는 고재호 사장은…]

고재호 대우조선해양 사장은 30년 이상 선박·해양 플랜트 영업을 맡아온 영업통으로 평가받고 있다. 1980년 대우조선해양에 신입사원으로 입사해 최고경영자(CEO)에 오른 첫 번째 인물이기도 하다.

고 사장은 2012년 사장 취임 이후 현장 경영과 소통 경영을 강조하고 있다. 사장 취임식 첫날에도 경남 거제시 옥포조선소에 있는 노조 사무실을 가장 먼저 방문했다. 그는 꾸준한 수주와 고객 확보를 위해서는 노사가 단합된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게 지론이다. 그래야 납기나 품질에서 고객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다는 믿음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고 사장은 요즘 대우조선해양을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갖춘 조선·해양 전문업체로 도약시키기 위해 전문 인력 육성과 확보에 관심을 갖고 있다. 그는 “대우조선해양의 사전에 ‘적당히’라는 단어는 없다”면서 “우리와 거래하고 경쟁하는 상대방은 세계 톱 클래스이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가 톱 클래스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강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