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명의 거인… 그 안에 수많은 거인

1990년 겨울 밤, 조각가 김영원(67·전 홍익대 교수)은 기이한 체험을 했다. 경기도 이천에서 기공(氣功) 수련을 마치고 차를 몰아 서울 우이동 집으로 돌아오던 길이었다. "눈길에서 속도를 내다가 계곡 아래로 추락했어요. 그런데 차가 추락하는 찰나의 순간에 제가 옆자리에 탄 수련자와 평온하게 대화를 하는 겁니다. 지붕이 폭삭 내려앉을 정도로 차가 망가졌는데, 둘 다 다친 데가 없었어요. 그래서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시공(時空)이란 건 없는 것 아닐까."

김씨가 2000년부터 지금까지 몰두하는 '그림자의 그림자' 연작은 그때의 느낌을 몇번이고 곱씹어 빚은 산물이다. 그는 "명상을 통해 내가 자유로워졌듯 인체가 갖고 있는 형태에서 자유로워진다는 뜻을 담았다"고 했다. 최근 서울 연건동 홍익대 대학로 캠퍼스 정면에 김씨의 대형 인체 조각상이 설치됐다. 8m 높이의 청동 조각 '그림자의 그림자-홀로 서다'. 입체와 평면이 절묘하게 뒤섞여 있어, 바라보는 각도에 따라 온전한 인간의 인체에서부터 직선으로 단면화된 형상까지 전혀 다른 형태가 보인다. 김씨는 "경계 없는 상태를 표현하기에 인간의 몸은 태생적 한계가 있다. 관절은 뒤로 꺾이지 않으니, 한계를 벗어나려면 인체를 사물화해야 했다"고 설명했다. 마치 사진을 오린 듯 평면 부조(浮彫)를 환조(丸彫)와 결합해 공간에 세웠다.

김영원은 서울 광화문 세종대왕상, 경북 구미의 박정희 전 대통령 동상을 만들었다. 동상 제작자로 대중적 명성을 얻었지만 본업은 조각가. 추상미술이 득세하던 미술계에서 인체라는 일관된 테마로 작업을 해왔다. "대학 3학년 때 추상 작품 '파열'로 대학미전 조각부문 그랑프리를 받았어요. 대세가 추상 조각이었지요. 큰 상 받고 우쭐해서 '이 작품은 전통에 대한 거부의 몸짓이요'라고 떠들었습니다. 그런데 군 입대 후 한밤중에 보초 서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듭디다. '아니, 서구의 실증주의·합리주의 정신을 한 번도 가진 적도 없는 우리가 대체 뭘 부정하나?' 남의 나라 얘기를 우리 얘기처럼 하는 게 우스워 보였습니다."

그때부터 사실주의를 표방하는 조각을 해왔다. 서울 환일고 미술교사로 근무할 때는 체력장에서 죽기 살기로 철봉에 매달린 아이들을 보며 '바로 내 모습 같다'는 생각을 했다. 1970~80년대 천착한 '중력, 무중력' 시리즈가 그렇게 탄생했다. "갈수록 내가 경직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1980년대 말에는 만들어놓은 조각을 높은 데서 내던져 깨뜨린 뒤 그 파편을 붙여 작품화했지요. 그렇게 나를 부정하고 나니 더 이상 할 게 없더군요. 극도의 피로감에서 선(禪)과 기공 명상을 만난 후 비로소 내가 아는 건 손톱만 한 세계에 불과했다는 걸 알았지요."

이번 '그림자의 그림자'는 대학로의 새로운 랜드마크가 될 것으로 보인다. 김씨는 2011년 만든 이 작품을 홍익대에 기증했다. "논어에 '화이부동(和而不同)이란 말이 있어요. 서로 조화를 이루나 같아지지는 않는다, 각각 다른 것이 뭉쳐서 하나의 개념 속으로 녹아 들어간다는 것. 내 조각에도 그런 뜻을 담았습니다." 그는 "보는 각도에 따라 여러 해석과 의미를 풀어낼 수 있는 작품이라 이곳과도 잘 어울린다. 홍익대 대학로 캠퍼스가 시각 예술을 넘어서 공연과 영상, 융합 예술의 산실로 자리매김하길 바란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