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생존하는 가장 영향력 있는 화가 데이비드 호크니. 그는 회화를 나이 든 사람의 예술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그림 그리는 일이 오랜 세월 천착해야만 비로소 어느 정도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고, 한편으론 천재가 아니어도 좋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호크니는 천재가 아니다. 그는 그저 열정적인 탐구심과 바지런한 행동력을 갖춘, 소위 좌뇌형 예술가라고나 할까?
1937년생 데이비드 호크니는 사진작가, 판화가, 삽화가, 그리고 무대 디자이너 등 여러 분야에서 전방위적으로 작업을 해왔다. 그렇지만 그는 결코 어떤 유파나 운동에 가담한 적이 없었으며, 언제나 자기만의 신선한 위트와 유머로 시대의 분위기가 담긴 그림을 그렸다. 그런 호크니를 가장 유명하게 만든 작품은 로스앤젤레스의 수영장과 아파트 그림이다. 지금도 그 특유의 평면적이면서도 나른한 오후의 햇살 속 수영장의 물결과, 동성애적 관계를 암시하는 분위기가 지배적인 그림이 떠오른다.
‘폴 호크니 I’(2009)
예술가들은 고독을 즐길 줄 아는 재능이 있어야 한다. 한편 호크니는 타고난 이야기꾼으로 누구와도 대화할 준비가 되어 있다. 모순적인 사실은, 이처럼 사교적인 성격의 호크니가 혼자 있는 것을 엄청 좋아한다는 사실이다. 그런 호크니는 1960년대 후반에 이미 스스로 ‘인기의 저주’라고 묘사한 바 있는, 좋다고만은 할 수 없는 스타의 위치에 올랐다. 그렇기 때문인지 그는 예술적 진화를 위한 침묵의 시간을 갖기 위해 지리적으로는 고립적인 성향을 보였다. 그가 파리, 뉴욕, LA, 런던, 요크셔 등으로 거주지를 자주 옮긴 것도 스스로를 고립시켜 충분히 탐구할 시간을 갖기 위해서였다. 그리하여 첫 오랜 외유는 1978년 나이 마흔에 이루어진 LA행이었던 것!
캘리포니아로 이주한 후 호크니의 작품은 선명한 색과 밝은 패턴, 야자수, 젊은이들, 평온하면서도 퇴폐적이며 관능적인 분위기로 바뀌어갔다.
LA를 사랑한 영국 남자, ‘드라이브’를 그리다
호크니가 뉴욕을 떠나 LA에 도착했을 때, 그는 매우 흥분했다. 그는 그곳에 아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묘한 성적인 매혹과 끌림을 느꼈다. 동성애자였던 호크니에게 그 도시는 어쩌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 어둡고 춥고 침울한 뉴욕과 런던 같은 도시보다는 자기 사랑에 훨씬 덜 제약적이라는 느낌을 주었다. 운전에는 젬병이었던 호크니는 LA에 도착한 지 며칠 만에 운전을 배웠고, 차를 구입했다. 그로서는 어마어마한 진화다! 호크니는 캘리포니아를 드라이브하는 일이 얼마나 장엄하고도 화려한 일인지를 깨달았고, 드라이브에 빠지기 시작했다. 거대한 자연 속에서는 드라이브가 곧 대지 위에 그리는 드로잉이라는 생각이 든다.
‘월드게이트의 쓰러진 나무들’을 작업하고 있는 호크니.
호크니는 운전을 할 때 음악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을 깨우쳤다. 청력이 약했던 그는 성능이 좋은 오디오 시스템을 장착하고, 스피커를 보강했다. 그러곤 음악을 조금 크게 틀어놓고 주변을 살피며 운전하면서 돌아다녔다. 호크니는 어느 날 바그너를 크게 틀어놓았는데 갑자기 그 음악이 산과 아주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사실 캘리포니아에 가면 클래식 음악이 아주 잘 들린다. 같은 음악이라도 한국에서 듣던 음악과는 전혀 다른 음악이라는 사실을 온몸으로 절감하게 된다. 자연이 거대하고 미니멀할수록 시선 또한 단순하고 존엄해진다. 동시에 청각이 무한대로 열리는 것이다.
호크니는 이런 풍경에 매료되어, 가끔씩 친구들을 불러 드라이브 여정을 연출하곤 했다. 일몰을 보기 위한 약 35분과 1시간 30분짜리 드라이브 프로그램을 만들었는데, 초대한 사람들에게 자연이 조명을 담당하기 때문에 반드시 정해진 시간에 와야 한다고 당부했다. 예를 들면 지그프리트의 장송곡이 최고조에 이를 때 모퉁이를 돌게 되고, 다시 음악이 고조될 때 갑작스럽게 출몰하는 장면을 보게 되는 식으로 여정을 짰던 것이다. 호크니는 이것을 보는 것과 듣는 것이 환상적인 방식으로 결합된 행위예술이었다고 고백한다. 이런 체험은 그대로 작업으로 이어진다. ‘태평양 연안 고속도로’, ‘산타 모니카’등 드라이브 회화 연작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월드게이트의 쓰러진 나무들’(2008)
뿐만 아니라 시각에 대한 호크니의 탐구심은 놀라울 정도다. 예컨대 이런 시각적 깨달음이다. “(LA에서) 운전을 해보면 많은 건물과 표지판들이 시속 48.3㎞에서 볼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반면 로마에서는 시속 3.2㎞에서 볼 수 있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곳에서는 걷는 것이 더 좋다”와 같은 종류의 것이다. 이때 화가의 탐구심은 과학자 이상이다.
고향으로 돌아온 오딧세이, 겨울 나무를 그리다
1990년대 후반 호크니는 캘리포니아에 머무는 시간을 줄이고 점차 런던에 더 많이 머무르게 된다. 매일 만나던 아주 가까운 친구가 생을 마감했기 때문이다. 엄청난 상실감을 느꼈던 그는 갑자기 런던행을 결심했다. 차츰 LA 생활을 청산하게 된 호크니는 2004년경 고향 요크셔의 북동부 작은 해안가 마을 브리들링턴으로 돌아왔다. 예술가에게 새로운 장소는 새로운 작품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다. 호크니는 직감적으로 또다시 새로운 것, 새로운 장소, 새로운 작업방식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피어블로섬 하이웨이, 1986년 4월 11일~18일(두 번째 버전)’(1986)
호크니가 요크셔로 돌아와 한 일 중 가장 중요한 일은 아주 큰 작업실을 얻은 것이다. 나이 든 화가가 새 작업실을 얻는 것은 좀처럼 드문 일이다. 나이를 먹게 되면 더 소심해지기 일쑤여서 변화를 두려워한다. 더 큰 작업실을 운용한다는 것은 보통의 나이 든 화가들에겐 아무래도 무리다. 그러나 호크니는 달랐다. 그는 어마어마한 대작 ‘와터 근처의 더 큰 나무들’(2007년, 4.5m × 12m)을 제작했던 기존의 작업실보다 훨씬 더 넓고 오래된 공장 건물로 작업실을 옮겼다. 호크니 평생 가장 큰 규모의 작업실이었다. 2008년, 그의 나이 72세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5년 계약으로 임대계약서에 서명했을 때 그는 20년이나 젊어진 것 같았노라고 회고했다. 호크니는 새 작업실을 얻었다는 것만으로도 자신이 더 이상 노쇠하지 않았다는 증거이며, 그로써 더 큰 활력을 얻었노라고 고백했다.
귀향한 후 지금까지 호크니는 계속해서 나무와 숲과 가로수를 그리고 있다. 호크니는 어떤 생각으로 나무와 대면했던 것일까? 그는 나무를 풍경 속에 자리한 인간의 형상, 곧 거인식물과 같은 것으로 여겼다. 어떤 것은 영웅적이고, 어떤 것은 우아하며, 또 어떤 것은 사악하다고 생각했다. 호크니는 성당이나 이슬람 사원은 아름답지만, 나무는 자라나기 때문에 때로는 건축 이상으로 예민하고 복잡한 매력이 있는 것으로 여겼다. 마치 “나무는 자기의 온몸으로 나무가 된다/ 아아, 마침내, 끝끝내/ 꽃피는 나무는 자기 몸으로/ 꽃피는 나무이다”(황지우의 시 ‘겨울 나무로부터 봄 나무에로’ 중에서)처럼 말이다. 이렇게 그려낸 호크니의 겨울 나무와 빈 숲은 비울 것을 다 비운, 몰골만 남은, 새 봄을 기다리는, 매번 다른 계절을 기다리는 존재인 것이다. 그리고 그런 형해의 풍경, 비어 있음의 충만함은 바로 자기 자신에 관한 것, 즉 자화상인 것이다.
‘무제, 2009년 7월 5일, No.3’ 아이폰 드로잉.
얼리어답터의 새로운 붓
호크니는 얼리어답터이다. 마치 노래방에서 최신가요를 부르는 시니어 같은 느낌이다. 얼리어답터가 된 것은 그가 강렬한 호기심의 소유자였기 때문이다. 엄청난 지적 호기심을 가진 호크니가 읽지 않은 책을 언급하기란 쉽지 않다. <다시, 그림이다>의 저자 마틴 게이퍼드와의 지난 십년간 대화는 경이로울 정도다. 평소 미술사에서 궁금하거나 의심스러웠던 부분, 나름대로의 직관으로 판단했던 오류들이 호크니의 입에서 그럴듯하게 술술 뿜어져 나왔다. 공감이 가지 않는 부분이 있다손 치더라도 그의 지적 방대함에는 고개를 숙이게 된다. 그의 스토리텔링에는 끊임없이 노력하고 천착한 자만이 갖는 깊이와 울림이 있는 것이다.
호크니의 빛나는 호기심은 스스로를 다른 장소에 두는 것뿐만 아니라, 새로운 매체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에까지 미친다. 요즘 그는 아이폰과 아이패드에 푹 빠져 지낸다. 그것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사실, 나이가 들면 새로운 통신수단에 둔감해지게 마련이다. 그렇지만 결혼한 적도 없고 아이도 없는 어른 아이 호크니에게 아이폰과 아이패드는 아주 신명 나는 새로운 장난감이다. 써도 써도 없어지지도 질리지도 않는 마술 같은 장난감 말이다.
그런 까닭에 호크니는 아이폰으로 전화를 거는 일이 적다. 물론 청력이 지나치게 나쁘기도 해서지만, 그는 아이폰이나 아이패드로 그림을 그리는 일이 얼마나 신나는 일인가를 실천하고 있는 중이다. 그렇게 해서 그린 그림을 문자 메시지로 친구들에게 즐겨 보낸다. 호크니는 매일 아침 싱싱한 꽃을 그려 친구들에게 보내는 일이 아주 즐겁단다. 자신이 보낸 꽃이 결코 시들지 않는다나! 게다가 한 점을 그려 15~20명의 사람들에게 보내줄 수도 있다는 사실에 아주 깊이 매료되었다고 한다.
‘개로비 언덕’(1998)
호크니 역시도 처음에는 아이폰이 익숙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는 반복 끝에 결국 잘 다루게 되었다. 그러면서 그는 아이폰이 사람을 대담하게 만들기 때문에 아주 매력적이라고 말한다. 어린아이만이 가질 수 있는 대범하고 용감한 붓질이 아이폰(아이패드)에선 아주 쉽고 용이해졌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그는 침대 위에서 생각나는 것을 곧장 드로잉하고 싶을 때도, 아이폰이나 아이패드가 훨씬 더 쉽고 선명하고 빠르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이처럼 호크니에게 새로운 기술은 엑스터시 즉 지적 흥분제와도 같았다. 호크니는 그림이 항상 인간으로 하여금 세상을 새롭고 깊이 있게 볼 수 있게 만들어준다고 생각했다.
반 고흐처럼 사물을 다르게 보는 것의 즐거움은 호크니에게도 역시 또 다른 오르가슴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가 소설이나 시를 읽을 때조차도 그의 즐거움의 대부분은 시각적인 쾌감에 가까운 것이었다.
호크니는 게이, 취약한 청력 등 스스로 제약을 많이 가진 사람임을 잘 알고 있다. 그렇지만 적어도 그는 그런 한계와 장애가 더 좋은 그림이 나오는 데 훨씬 더 기여했다는 사실도 안다. 무엇보다 호크니는 인간의 가장 큰 욕망이 ‘흔적 만들기’라는 사실을 깨달았고, 그것을 몸소 실천한 화가다.
글쓴이 유경희는 대학에서 국문학, 대학원에서는 미학을 전공한 후, 시각예술과 정신분석학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홍익대 미술대학원 현대미술최고위과정을 비롯해 국립현대미술관, 유명사립미술관아카데미, CEO를 위한 특강 등 대중 강좌를 진행하고 있다. 저서로 <예술가의 탄생>, <10개의 테마로 만나는 아트살롱> 등이 있다. 현재 ‘유경희예술처방연구소’를 운영, 예술과 인문학을 통한 코칭과 멘토링 등 맞춤교육 서비스를 진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