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4.03.26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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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기만 해도 즐거워지는 말이다. ‘놀이가 일이고, 일이 곧 놀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출근이라는 지옥은 멀찌감치 사라질 텐데. 여기, 놀이를 일로 삼은 부러운 사람들이 있다. 누군가는 우연한 기회에, 누군가는 오래도록 학수고대한 끝에 꿈을 이뤘다. 사람들은 이들을 가리켜 말한다. 진정한 능력자 혹은 괴짜라고.


이광만 나무와문화연구소 소장

“갓 산 양복을 입은 느낌. 내 몸에 맞지 않는 옷 말이다. 직장생활을 하는 20년이 그랬다.”지난 2006년부터 대구에서 조경수를 기르는 재미에 푹 빠져 지내는 이광만(56) 소장.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 시절 이 소장은 또래들이 으레 그랬듯 단순히 예비고사 점수에 맞춰 진로를 결정했다. 대학에서 적성과 무관한 전자공학을 공부하고 금성사를 시작으로 여러 회사를 거친 그는 전자공업 계통에서만 자그마치 20년을 일했다.

이광만 나무와문화연구소 소장
사진 염동우(C.영상미디어)
“다른 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늘 있었다. 그런데 막상 결혼하고 자식 낳고 하다보니 사정이 여의치 않았다. 아이들이 대학에 들어가고 나서야 비로소 마음의 여유가 생기더라. 이제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한번 해보자’는 생각이 물밀듯 밀려왔다.” 인생을 여든까지 놓고 봤을 때, 반은 의무를 다하며 살았다면 나머지 반은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사는 게 맞다는 생각이 그를 부추겼다.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 말이다. 사직을 결심한 때가 40대 중반. 어릴 적부터 자연을 좋아했다는 그는 다른 분야는 돌아볼 것 없이 과감히 나무를 택했다. 사직서를 쓰자마자 바로 조경수계로 뛰어든 것이다.

멀쩡한 직장을 관두고 어느 날 갑자기 나무를 심겠다고 나선 그를 가족들이 반겼을 리 없다. “아내의 만류가 심했다. 여태까지 잘 해왔는데 뭐가 문제냐고, 왜 이 나이에 새로운 걸 하려느냐고 했다. 송충이는 솔잎 먹고 살아야 한다고.” 하지만 아내는 결국 그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그렇게 그는 동생에게 대구 근교 800평 땅을 빌려 느티나무, 은행나무, 이팝나무를 심었다. 일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생전 농사라곤 지어본 적 없는 그에게 처음 3년은 시련의 시간이었다. 씨앗을 사 심었는데 화학처리를 했는지 묘목이 자라지 않아 애를 먹기도 하고, 사기를 당하기도 했다. 자리를 잡기 시작한 건 2010년 즈음. 현재 이 소장은 총 4000평 대지에 나무를 심고 있다. “이따금 조경수 재배 특강에 나설 때면 실패담을 많이 들려준다. 그러면 배우는 이들이 타산지석이라고, 더 도움이 된다고 하더라(웃음).”

지난 2010년부터는 나무와 문화의 개념을 합한 ‘나무와문화연구소’를 열고 본격적으로 강의 및 집필 활동에 열중하고 있는 이 소장. 요즘이 직장생활 할 때보다 더 분주하다고. “매일같이 4시 반에 일어나 인터넷 카페, 블로그 관리로 하루를 시작한다. 정신이 맑은 아침 시간에 글을 쓰고, 나무 관련 공부도 한다. 내가 좋아하는 일이다보니 더 부지런히 활동적으로 하게 되는 것 같다. 직장생활이었다면 어림도 없다.”

지금껏 <우리나라 조경수 이야기>, <전원주택 정원만들기>, <나뭇잎 도감> 등 3권의 책을 낸 이 소장은 앞으로 20권의 책을 더 쓰는 게 인생의 중요한 목표라고 말한다. “우리나라엔 아직 도감 등 실용서가 드물다. 나무를 기르는 데 필요한 실질적인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책. 공부하는 이들에게 꼭 필요한 책을 쓰고 싶다.” 아울러 이 소장은 또 하나의 목표로 자연풍의 정원 디자인 이론을 만드는 것을 꼽는다. 기존의 틀에 얽매이지 않는 ‘이광만 스타일’의 정원 이론을 만들어 대중과 자연으로 소통하고 싶다는 뜻을 밝힌다.

“40대 중반의 결단 후 여기까지 왔다는 게 매우 기쁘다. 주변에선 한결같이 부러워한다. 나는 마흔이 넘어 겨우 내가 좋아하는 길로 들어섰지만, 더 일찍 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물론 지금 이 순간도 늦었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교직에 있는 아내는 2년 후 퇴직을 하고 나면 함께 나무와문화연구소를 이끌 예정이다. 연구소 부소장으로 이름을 올린 후 원예치료사 자격증까지 땄다는 아내. “내가 처음 이 일을 한다고 했을 때는 송충이 운운하더니, 지금은 아내가 더 만족한다(웃음). 나이 들어 부부가 같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게 얼마나 좋은지.”


손원경 토이키노뮤지엄 대표

지난 1월 몇 명의 수집가와 함께 쓴 <마니아씨, 즐겁습니까?>에서 손원경(43) 대표는 이야기했다. “장난감 수집 욕심에는 때와 장소가 없다. 어떤 상황에서도 쉽게 자제하지 못한다. 프라하로 떠난 신혼여행에서도 어쩔 수 없었다. 예쁜 장난감을 보면 나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고 아내를 쳐다본다. 그러면 아내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애써 감추며 사고 싶으면 사라는 사인을 보낸다. 일주일동안 사 모은 장난감만 트렁크 5개는 족히 됐다.”

손원경 토이키노뮤지엄 대표
사진 조혜원(C.영상미디어)
그렇다. 손 대표는 수집가다. 장난감에 대한 손 대표의 집요한 애정은 ‘토이키노뮤지엄(2006~2011년. 올해 안에 재개관 예정)’이라는 공간을 탄생시켰다. 열다섯 살 때부터 조금씩 사 모은 장난감은 서른이 되자 더 이상 집안에서 감당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 그 무렵부터 박물관을 구상했고 30대 중반 그는 마치 예정된 수순처럼 장난감박물관의 수장이 됐다. 사진과 영화가 주업인 그에게 장난감박물관은 자신의 수집품 중 가장 좋아하는 것으로 하는 또 하나의 일이 된 셈(손 대표는 장난감 외에도 동화책, 사진집, DVD 등을 수집한다). “사람들은 내게 왜 장난감 수입업을 하지 않느냐고 묻곤 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장난감을 물건처럼 사고파는 건 재미가 없으니까. 내가 좋아하는 게 장사가 되는 건 싫다.”

어릴 적 ‘스타워즈’나 ‘600만 불의 사나이’를 보고 자랐다는 손 대표. “여섯 살 즈음 가지고 놀던 600만 불의 사나이 피겨는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고 말하는 그는 자신의 수집벽을 가리켜 ‘현실 도피’ 혹은 ‘삶에 대한 애착’이라고 설명한다. “어릴 적부터 집안에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친척들 간 송사(訟事)를 치르기도 하고…. 사람을 신뢰하지 못하는 습관이 생긴 것 같다. 그러다보니 장난감에서 위안을 얻게 된 게 아닐까.” 그리고 이렇게 덧붙인다. “물론 그런 개인사가 없었더라도 나는 장난감을 좋아했을 것이다. 이렇게까지 ‘심화된 집착’은 아니었겠지만(웃음).” 영화나 애니메이션 캐릭터를 비롯해 빈티지인형, 민속인형 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 수집해 온 손 대표가 현재 보유한 아이템은 20만 점. 한창 무렵엔 50만 점이 넘었지만 몇 년 사이 조금 줄었다. 물론 요새도 계속 모은다. 3개월 전부터는 일본 애니메이션 ‘원피스’ 캐릭터에 꽂혀 있다.

하지만 요즘 손 대표가 가장 몰두하는 것은 뭐니 뭐니 해도 토이키노뮤지엄의 재개관 작업. “무조건 올 연말, 늦으면 내년 초엔 다시 문을 열 계획이다. 현재 몇 곳의 장소가 물망에 올라 있다”고 전한다. 재개관하는 토이키노뮤지엄은 한층 업그레이드된 모습으로 대중과 만나게 될 전망이다. “앞으로 어떤 발전된 모습을 보여야 하나 고민이 된다. 사실 지난 2011년 박물관 문을 닫게 된 것도 ‘이 좁은 공간 안에서 더 이상 뭘 보여줄 수 있을까’ 하는 고민 때문이었다. 어떤 새로운 공간을 탄생시킬 것인가? 그 대안 중 하나는 박물관과 함께 하는 ‘장난감 사진관’이 될 것이다.” 자신의 전공을 살려 새로운 영역의 사진관을 구상 중인 그는 “상상의 여지를 두겠다. 확실한 건 매우 판타스틱한 공간이 될 것이다”고 귀띔한다.

놀이와 생업의 경계를 자유자재로 오가는 손 대표. “요즘도 관람 문의가 많이 온다. 기다리고 있는데 왜 얼른 문을 열지 않느냐고 성화하는 이들도 많다. 이런 기대들이 내가 살아가야 할 이유가 된다.” 앞으로도 장난감을 통한 그와 대중의 문화교류는 계속될 것이다.


김윤경 멱콜렉션 대표

“나는 쉰여섯 살에 리빙디자이너로 데뷔했다. 지금은 예순여덟이다.” 이보다 대단한 자기소개가 있을까. 김윤경(68) 대표는 우리의 공예를 기반으로 의식주와 관계된 모든 것을 디자인 프로듀싱하는 사람이다. 각 분야의 디자이너들과 함께 기존에 없던 새로운 것을 창출하는 것. 한지옻칠카펫, 춘포(春布)스카프, 왕골냅킨홀더 등이 모두 그의 아이디어로 탄생한 아이템들이다. “기존의 1차 공예에 새로운 생각으로 디자인을 덧입힌 2차 공예가 내 일이다. 이런 일에 내 스스로 특별한 재능이 있다고 믿는다.”

김윤경 멱콜렉션 대표
사진 조혜원(C.영상미디어)
실제로 2009년 한국스타일박람회나 지난해 중앙민속박물관에서 열린 ‘아시아 혼례문화’전 등의 프로젝트에서 선보인 김 대표만의 디자인은 업계와 대중의 놀라움을 자아냈다. 특히 그가 한국스타일박람회에서 선보인 옻칠한지, 옻칠테이블 등으로 꾸민 다실(茶室)은 우리의 전통을 현대 공간에서 더없이 세련되게 각색해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바쁜 남편’ 덕분에 오랜 시간 주부로 지내야 했다는 김 대표. 그러나 그는 평범한 주부는 아니었다. “방 한 칸으로 결혼생활을 시작했다. 돈이 없었는데도 ‘집은 예쁘게, 음식은 맛있게’가 내 모토였다.” 그만큼 의식주에 대한 그의 관심은 남달랐다. 미감(美感)에 있어서는 놀라울 정도로 예민했다. 그의 이 예민한 감각은 한국관광공사 사장을 지낸 남편 덕분에 더욱 갈고 닦은 것인지도 모른다. 남편을 따라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각국의 아이템을 수집하고, 문화를 공부한 것이 그에겐 큰 힘이 됐다. 그 이전 젊은 시절 13년간 영국대사관에서 근무한 경험도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

“외국의 것을 접하면 접할수록 우리 것의 파워를 절실히 느꼈다. 우리만의 차별성은 결국 우리 안에 있다는 걸 알았다.” 이 같은 뜻을 기반으로 김 대표의 멱콜렉션은 탄생한다. ‘찾을 멱(覓)’ 자를 썼다. 옛것을 찾아 계승·발전시키고자 하는 의미를 담았다고 김 대표는 설명한다. “우리 선조들이 썼던 아름다운 것들을 찾아 계승하는 게 중요하다. 민족성에 의존하자는 얘기가 절대 아니다. 미(美)적인 것으로 승부해야 한다.”

사라져가는 전통의 아름다움을 발굴, 디자인으로 현대에 맞게 발전시켜나가는 데 힘을 쏟고 있는 김 대표가 최근 가장 몰두하고 있는 소재는 한지와 단청이다. “한지로 커튼, 카펫 등 실생활에 필요한 것을 만들려 애쓴다. 전통의 소재들을 우리 생활에 어떻게 더 녹여낼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다.”

김 대표는 이런 고민으로 바쁜 지금이, 좋아하는 일을 뒤늦게나마 직업으로 삼은 지금이 행복하다고 말한다. “내가 찾고 공부한 것을 나 혼자 쓰는 게 아니라 많은 이들과 나눌 수 있다는 게 좋다. 물론, 많은 이들과 함께 즐기려면 그만큼 내가 더 프로페셔널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그는 거의 매일 전국 각지의 시장, 백화점, 갤러리 등지를 돈다. 우리의 선(線)과 색(色)에 대한 공부도 멈추지 않는다.

“이 나이에 이름 날리고 그런 것 원치 않는다. 그저 내가 갖고 있는 것을 많은 이들에게 보여주고 나누고 싶은 것뿐이다. 그게 보람이다.”

남들보다 늦게 일을 시작한 것에 대한 아쉬움은 없을까. “나이가 있기 때문에 자존심 강한 여러 디자이너의 마음을 움직이고 설득하는 작업이 좀 더 수월한 게 아닌가 생각한다. 편안하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 그게 지금의 내 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