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추억, 香水가 되다

"서울에 도착해서 시차 때문에 제대로 잠들지 못한 날이었어요. 새벽에 깨어 달리기를 했죠. 동틀 녘의 푸르스름한 하늘, 바람에 섞인 소나무 냄새가 저를 깨웠어요. '아, 이게 서울의 향기겠구나'라고 생각했죠. 그렇게 '서울의 새벽(Alba di Seoul)'이란 향수를 만들었습니다."

이 남자에게 인연은 곧 향수(香水)가 되고 또 화장수가 된다. 이탈리아 피렌체의 화장품 회사 '산타 마리아 노벨라(Santa Maria Novella)' CEO 유제니오 알팡데리(65·Alphandery)는 경영자인 동시에 기계공이고, 화장품·향수 제조자다. '알바 디 서울'도 그가 만든 향수로 현재 전 세계 시장에서 팔린다. 지난 20일 서울 중구 소공동 백화점 매장에 나온 알팡데리는 "한국 소비자는 전 세계 그 어느 나라 소비자보다 제품을 보는 눈도 깐깐하고 충성도도 높다"고 말했다.

산타 마리아 노벨라는 본디 피렌체의 같은 이름의 성당 바로 옆에 자리한 약국이었다. 1621년 당시 피렌체를 다스리던 메디치 가문으로부터 공식 약국으로 인가를 받고 대중에게도 제품을 팔기 시작했다. 알팡데리는 그 근처에서 나고 자란 기계 설비 전문가였고, 1990년 이곳 약국 시설을 점검하는 일을 맡았던 것을 계기로 CEO 자리에 앉았다.

알팡데리는 "400년이란 전통만 믿고 버티는 건 박물관에나 통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전통 제작 방식은 존중하되, 몇몇 공정에 혁신을 도입했습니다. 모든 제품의 이동 경로를 추적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고, 특수 설비 공장을 세워 제품 숙성과 보관을 용이하게 하는 식이었죠."

혁신만 입힌 것은 아니다. 알팡데리는 전 세계를 여행하면서 얻은 영감으로 다양한 향수와 화장수를 직접 개발했다.

산타 마리아 노벨라의 몇몇 제품은 국내에서 '고현정 크림' '송혜교 향수'라는 별명으로 유명하다. 이들이 실제로 즐겨 사용한다는 소문이 났기 때문이다. 워낙 한국 소비자들이 피렌체 현지 매장에서 물건을 많이 사들이다 보니, 이탈리아 직원에게 "고현정 크림"이라고 우리말로 말해도 알아듣는다. 알팡데리는 "한국 소비자들에게 인기가 많고, 가끔은 그래서 물량이 모자란다. 하지만 물건을 한꺼번에 많이 팔고 싶진 않다"고 말했다. "어차피 일일이 손으로 만들고 포장하다 보니 대량생산이 쉽진 않아요. 우린 느린 회사입니다. 많이 사는 소비자보단 기다릴 줄 아는 소비자를 찾고 싶지요." 알팡데리는 "가끔 피렌체 전통 공법으로 만든 우리의 유리병을 1000개씩 주문하는 고객도 있다. 그럴 때 나는 '10년은 기다리셔야 한다'라고 답한다"며 웃었다.

산타 마리아 노벨라는 국내 판매 가격이 이탈리아 현지 판매 가격보다 꽤 높아 논란이 된 적이 있다. 현재도 몇몇 제품은 2배가량의 가격에 판매된다. 알팡데리는 "가격 격차를 좁혀나가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