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니어 에세이] 고등학교 동문 모임

고등학교 졸업 후 벌써 30년의 세월이 지났다. 작년 6월 한 친구가 밴드를 만들었다. 밴드란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 유행하는 친한 사람끼리 휴대전화 번호를 등록하면 하나의 그룹이 형성되어 한 친구가 문자를 작성하면 그 밴드에 가입된 친구에게 동시에 전달되는 SNS의 일종이다. 처음엔 별로 호응이 없어서 몇 달간은 가입하는 친구가 한둘 정도였다.

그러나 어느 날 새로 가입된 친구가 적극적으로 가입을 권유하면서 갑자기 엄청난 속도가 가입하는 친구들이 늘기 시작했다. 밴드가 만들어지고 6개월 되는 시점에 거의 한 달 만에 130명의 친구가 가입하게 되었다. 물론 나서서 일을 추진하는 한 친구의 열정적인 노력과 헌신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특히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 살아가는 가장들이 터놓고 얘기할 수 있는 communication 공간이 없음을 불현듯 느꼈다.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대학을 입학하고 군대를 갔다 와서 취직하게 되고 그 취직과 동시에 취업 전선에서 살아남기 위해 각자의 일터에서 앞만 바라보고 열심히 달려왔을 친구들. 그 친구들이 이제 각자의 위치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의사, 경찰 간부, 대기업 임원, 고위 공무원, 사업가 등등 이 친구들이 갑자기 고등학교 동문회 모임에 왜 이렇게 급격히 참석하는가에 대해 새삼 돌이켜 생각해보게 된다. 앞만 보고 무작정 달려와 이제야 제대로 안정된 경제적 기반을 어느 정도 구축을 했다고 생각한 순간 친구들 주위엔 가족이 보이지 않았다.

늘 바쁘다는 핑계로 가사 일은 아내에게 공부하는 아이들은 공부에 방해된다는 핑계로 제대로 대화 한번 가지지 않았던 십수 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이제 막상 여유를 갖고 대화를 시도하려는 순간 아내와 아이들은 자리에 없었다. 왠지 살갑게 다가서려고 해도 오히려 아이들이 더 어색해하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그렇다고 회사란 곳에서 개인적인 감정을 드러내놓고 편하게 얘기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그 돌파구를 친구들은 찾고 있었다. 그 돌파구가 마침내 밴드가 되었다. 밴드에 등록된 친구들을 off Line으로 3월 초 서울 강남 모 식당에서 모임을 했다.
 
고등학교 때 한 학년이 700여 명 되어 한 반이 아닌 친구들은 거의 기억을 할 수가 없었다. 한 반이었던 친구도 기억이 제대로 나지 않은 상황에서 모임에 20여 명의 친구들이 참석했다. 30년 만에 보는 친구들이 대부분이라 처음에 상당히 어색해했다.

그러나 고등학교 담임 선생님 별명을 기억하고 얘기하면서 분위기는 점점 무르익어 갔고 그러면서 누구 할 것 없이 스스럼없이 낯선 얼굴임에도 불구하고 이름을 부르고 짓궂은 장난과 가끔 욕설도 섞어가면서 대화를 이어갔다. 머리카락이 전직 대통령과 흡사한 친구, 머리카락이 완전 백발인 친구, 배가 임산부 정도로 불룩한 사장님 타입의 친구 등등 30년의 세월은 친구들의 모습을 많이 변하게 하였다.

취중 진담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날 모인 친구들 모두 이구동성으로 내 아들, 딸만은 우리가 살아온 것처럼 살게 하지 말자는 게 공통된 의견이었다. 그러나 대한민국에 사는 한 치열한 경쟁 구도하에서 어쩔 수 없지 이렇게 살아야 하는 현실로 내몰리는 것이 안타깝다는 것에 또한 의견이 모였다.

각자의 분야에서 20년 이상을 일해 온 친구들이 각자의 분야에선 전문가이지만 다른 분야 친구들의 얘길 들으면서 새삼 새로의 분야의 세계도 접하게 되면서 동문회 모임의 새로운 의미도 찾게 되었다. 과거엔 Know-How의 시대라고 했지만, 지금은 Know-Where 시대라는 말을 절실히 실감하게 된 동문 모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