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할리우드의 구세주 되다

해리 포터에서 마블 코믹스까지, 베스트셀러를 블록버스터로 만들어 재미를 본 할리우드가 사상 최고의 베스트셀러인 성경(聖經)에 몰두하고 있다. "성경이 할리우드의 새 프랜차이즈"라는 말까지 등장했다. 원작(原作) 하나에서 다양하게 변작(變作)되는 영화를 '프랜차이즈 무비'라고 부른다. 대런 아르노프스키가 연출한 '노아'는 북미에서 개봉 첫 주 4400만달러(약 450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선 오브 갓'도 지금까지 북미에서 5857만달러를 벌어들였다. 미국 히스토리 채널의 드라마 '더 바이블'의 일부를 영화로 옮긴 작품이다. '모세의 기적'을 그린 리들리 스콧 감독의 '엑소더스'는 올해 말 개봉 예정이며, 윌 스미스 주연의 '더 리뎀션 오브 카인', 브래드 피트가 빌라도 역을 맡은 '본디오 빌라도'도 제작 중이다.

◇저작권료 안 내는 베스트셀러

성경은 할리우드가 원하는 프랜차이즈 조건에 딱 맞아떨어진다.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책이고, 성경을 읽은 적 없는 사람이라도 노아나 모세 같은 성경 속 인물에 익숙하다. 초자연적 고난과 모험을 겪는 성경 속 캐릭터는 히어로 영화 주인공과 비슷하다. 미국 경제지 포브스 온라인판은 "성경에는 사람들이 열광할 만한 극적인 사건들이 있고, 이런 사건들은 영화의 여러 장르로 충분히 확장될 수 있다"고 했다. '선 오브 갓'의 프로듀서 로마 다우니는 "요즘 미국인들은 정치적 음모와 사랑, 희망을 다룬 이야기를 원한다"며 "성경에 이 모든 것이 있다"고 했다.

실제로 최근 성경 영화에 막대한 제작비가 들어가면서 성경 속 이야기에 감독의 상상력이나 영화적 재미를 더하는 장치를 덧붙인다. 종교적인 색채를 묽게 하고 다수의 관객을 겨냥한 블록버스터로 만드는 것이다. '노아'에는 성경에 없는 거인이 등장하고, 노아는 가족과 대립한다. 성경 영화라기보다 판타지를 섞은 재난 영화에 가깝다. 크리스천 베일이 주연한 '엑소더스' 역시 스펙터클을 강조한 블록버스터가 될 가능성이 높다.

성경에는 다른 베스트셀러와 달리 독점권이 없다. 누구나 저작권료나 판권료를 한 푼 내지 않고 성경 속 이야기를 맘대로 각색할 수 있다. '해리 포터' 시리즈의 작가 조앤 K 롤링은 인세와 영화판권으로 1조원에 가까운 돈을 벌었다.

◇신앙과 논란의 마케팅

주요 언론의 영화 리뷰를 모아 점수를 매기는 사이트 '메타 크리틱'에서 '선 오브 갓'이 받은 점수는 37점(100점 만점). 대부분의 북미 언론에서 혹평을 했다. 그런데도 이 영화가 박스오피스에서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것은 종교적인 이유로 영화를 택한 관객이 많았다는 것이다. 프로듀서 필 쿡은 뉴욕 데일리 뉴스 인터뷰에서 "미국에만 복음주의 기독교인이 9100만명이다. 할리우드는 이들을 잠재적인 관객이라고 보고 있다"고 했다.

저작권료를 내지 않는 대신, 성경 영화는 종교적 논란에 휩싸이기 쉽다. '노아'는 성경을 충실히 옮기지 않았다는 이유로 교인들 사이에서는 찬반 논쟁이 거세다. 멜 깁슨이 연출한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는 반유대주의로,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의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은 신성 모독으로 비난을 받았었다. 포브스는 "성경 영화를 만들기만 하면 이렇게 화제의 중심이 된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마케팅 효과"라고 했다.

[한국 영화의 이야기 창고는 조선왕조실록]

국내에서 성경에 비견할 만한 '스토리의 보고(寶庫)'는 조선왕조실록이다. '최종병기 활' '광해' '관상' 등 역사 기록을 모티브로 만든 영화들이 잇따라 흥행하면서 실록은 영화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원작이 됐다. 올해도 각각 정조와 이순신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역린〈사진〉'과 '명량: 회오리 바다'가 개봉할 예정이다. '광해'를 제작한 원동연 리얼라이즈픽처스 대표는 "실록에는 음모와 배신, 사랑을 담을 수 있는 이야기가 많다. 이런 소재를 발굴해 대중영화로 만들려는 작업이 많이 이뤄지고 있다"고 했다. 국학 전산화 작업이 이뤄지면서 실록이나 사료를 찾아보는 것이 쉬워졌다. 시나리오에 역사적으로 정확하고 깊은 내용을 담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작년 조선일보와 한국콘텐츠진흥원에서 주최한 '스토리 공모대전'의 대상작도 추사와 현종의 후계를 다룬 팩션(faction)이었다. 이 작품을 쓴 김상훈 작가는 "실록을 보면서 아이디어를 얻었다"며 "우리 역사 5000년 속의 사건과 인물들을 활용해 콘텐츠의 바탕을 다질 수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