鐵鋼王(철강왕) 드라마? 부모 세대의 피땀 어린 이야기

이번엔 '철강왕'이다. 신라 태종무열왕부터 발해 대조영, 고려 왕건, 대한민국 대통령까지 섭렵해 온 '왕 전문 배우' 최수종(52)이 18일 시작하는 TV조선 새 금토드라마 '불꽃 속으로'에서 포항제철 설립자 박태준(1927~2011) 포스코 명예회장을 연기한다.

"시대극 한번 찍으면 너무 고돼 '다신 안 한다' 소리가 절로 나오죠. 그런데 시나리오를 받아들면 또 욕심이 생겨요." 지난 9일 서울 청담동 한 호텔에서 만난 최수종은 "이 작은 나라에 이런 거인이 있었구나 하고 전율이 왔다"고 말했다.

드라마는 용광로처럼 불꽃 튀는 1960~70년대, 제철보국(製鐵報國) 기치 아래 대한민국의 형태를 주조해 나가던 강철의 시대를 그린다. 정치적으로 민감할 수 있다는 건 이 때문. 최수종은 "군사독재 시대였기에 정치적 얘기가 안 들어갈 순 없다"면서도 "한 인물을 추앙하는 전기(傳記)가 아닌 격동의 시대, 폐허를 일으킨 부모 세대의 피땀과 고민을 얘기하는 드라마"라고 말했다.

그는 박태준을 연기하려고 자서전을 읽고, 포스코 측으로부터 박태준의 생전 사진과 영상이 담긴 CD 10장을 받아 캐릭터를 연구했다. 아내 하희라가 "시대극을 찍을 땐 국어사전을 끼고 단어 장단(長短)까지 구분해 발음할 정도"라고 혀를 내두른 철두철미함이다.

최수종이 본 박태준은 땀내로 진동한다. 극중 성인 박태준이 처음 등장하는 장면 역시 그렇다. 광산에 도둑이 들어 원석을 훔쳐가자 인부들은 정신없이 차를 집어타지만, 광산 사장인 박태준은 두 발로 뛰며 외친다. "기름 한 방울 안 나는 나라에서 뭔 차야! 빨리 못 내려?" 그가 본 박태준의 사진들 역시 대부분 현장에서 찍은 것이었다. "제철소 인부들과 부둥켜안거나 일하고 있는 모습이었죠. 홀쭉한 몸매, 막걸리 한 사발에 손으로 총각무 집어 먹는 소탈함이 기억에 남아요."

최수종은 봉사활동 경력을 인정받아 2005년 설립된 포스코 청암재단의 첫 비상임 이사로 2년간 일했고, 2008년엔 당시 재단 이사장이었던 박태준을 만나 "나중에 회장님을 연기하고 싶다"고 말한 적도 있다. 최수종은 "말이 씨가 됐다"면서 "그분이 어릴 적 일본에서 공부해서 그런지 경상도 사투리는 안 쓰시더라. 연기 부담이 줄었다"며 웃었다.

생전 박태준은 "편한 나라가 잘사는 나라"라고 말하곤 했다. 최수종은 "우리 부모 세대가 지금의 편한 나라를 만들었지만, 지금 세대는 이 세상이 만들어지기까지의 과정에 대해선 관심이 없는 것 같다"고 했다. "'우리가 이렇게 고생했으니 너희도 고생해봐라'는 심보는 아니더라도 불편을 감수하지 않으면 창조도 혁신도 없다는 걸 알았으면 좋겠어요." 열다섯, 열네 살 된 아들·딸에게 여태 스마트폰을 사주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그의 좌우명은 'slowly and highest'(느리지만 가장 높은)다. "2008년쯤 비행기에서 경제지를 읽었는데, 미국 경제학자가 '속도와 편리만 외치다간 큰일난다'면서 주장한 말이에요. 저희 부부가 세운 S&H엔터테인먼트도 이 단어의 줄임말이에요. '수종&희라'의 약자가 아닙니다."

명색이 '왕'이지만 이번엔 칼도 말(馬)도 없다. 화장도 거의 안 해 얼굴에 주근깨며 잡티가 그대로 드러나고 머리도 대충 바리캉으로 민 것처럼 털털하다. "새까만 얼굴로 나올 거예요. 대사에도 있거든요. '광산에서 일만 해서 그렇다'고요. 살도 2㎏ 더 뺄 거예요. 불꽃 속에서 땀 뚝뚝 흘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