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니어 에세이] 휠체어로도, 지게로도 간다

재작년 돌아가신 아버지를 모신 성당 추모관에 다녀오면서 언니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우리 아버지는 왜 자식들과 추억거리를 많이 만들지 않으셨을까…. 아까 유골함 앞에서 아버지와 즐거웠던 순간들을 떠올리려고 해도 생각나는 게 별로 없더라….”
 
어린 시절, 방학을 맞은 우리를 충청도 외가에 데려다 주시려고 함께 기차에 올랐던 때 외에 아버지와 여행했던 기억은 없다. 바캉스는 고사하고 하다못해 동네 수영장이나 놀이터조차 아버지와 함께했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저 일만 아시던 당신의 취미생활이란 조기축구회에서 공을 차는 것과 법주 한잔 들며 TV 축구 중계를 보는 것 정도셨다.
 
가끔 “내 다리통 봐라” 하며 자랑하시더니 이따금 등산으로 바꾸셨다. 그러다 점차 기력이 약해지시면서부터 등산은 약수터에 가서 물 떠오기로 달라지셨다. 그나마 낙상사고로 고관절 수술을 하신 이후로는 집안에서 TV를 벗 삼으셨을 뿐이었다.
 
대한민국이 춥고 배고프던 시대, 그 격랑을 헤치고 자수성가하신 당신은 스스로는 물론이고 가족과 함께 즐긴다, 논다는 개념이나 방법을 알지 못하셨던 것 같다. 그런 점에서 나는 동네 쇼핑센터 가까이에 있는 구둣방 아저씨를 몹시 존경한다. 미닫이문을 열고 허리 굽혀 들어서면 제법 창문도 둘이나 나 있는 작은 컨테이너 구둣방이다.
 
하루는 구두 굽을 갈기 위해 찾았더니 ‘여행으로 1주일간 휴무합니다.’라고 써 붙어 있었다. 다시 문을 연 아저씨에게 어디 다녀오셨느냐고 물으니 발리를 여행했다고 한다. 혼자나 부부 동반 정도였다면 존경까지는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올해 일흔 살이라는 아저씨는 1남 3녀의 자식들과 손자, 손녀들까지 대부대를 몰고 갔다 왔노라고 했다. 자식들이 준비해서 매년 그렇게 가기 때문에 동남아시아는 안 가본 데가 없고, 유럽도 섭렵했다는 것이다.

초년고생은 책으로 몇 권을 써도 모자랄 정도지만, 초등학교만 겨우 나와서 쓰지 못한다는 아저씨지만 생활철학은 분명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돈을 벌기도 전에 쓸 데만 부지기수였다. 아내가 힘들다고 하면 "쓸 데부터 생기니 얼마나 좋으냐, 벌어서 쌓아 놓기만 하면 그건 돼지다."라고 말했단다.
 
"세상은 어려운 한 때가 지나면 좋은 한 때가 온다. 나이 예순이 지나면 욕심을 다 내려놓아야 한다. 그러니까 오히려 뭔가 절로 생겨나더라. 일하러 나오면서 아침마다 아내에게 말한다. 고맙다고. 그러면 아내는 ‘우리 너무 행복해서 남들에게 미안해 어쩌지?’ 한다.” 고명한 박사님이나 대기업 회장님 부럽지 않아 보이는 분이다. 


함께하는 순간들
 
추모관을 나오자마자 역사가 오래된 성직자들 묘소가 눈에 들어왔다. 비탈진 곳이라 쉽지 않을 텐데도 한 가족이 휠체어에 노인을 태우고 둘러보고 있었다. 언니가 말을 이었다.
 
“얼마 전 제주도에 갔을 때 저렇게 휠체어를 타고 가족들과 여행 온 노인을 봤거든. 전에는 굳이 불편한 몸을 이끌고 다니면서 가족들을 힘들게 해야 하나 싶었는데 요즘은 생각이 달라졌어. 본인이나 주위가 좀 불편하면 어떠니. 그래도 살아있는 한 함께하는 즐거운 순간들을 많이 만들어야겠구나 싶어. 부모 자신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자식들을 위해서도. 그래야 돌아가신 후에라도 추억할 거리가 있잖겠니.”
 
모처럼 큰마음 먹고 알래스카 크루즈 여행을 다녀왔다는 한 지인의 얘기가 생각났다. 휠체어를 탄 은발의 서양 할아버지가 가족들과 함께 크루즈를 오르내리는 걸 보고 놀랐다고 한다. 휠체어에 의지할지라도 얼마든지 여행할 수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됐다는 것이다.
 
휠체어로는 불가능한 곳까지 여행했던 구순의 할아버지도 있다. 지난 2006년, 많은 사람의 마음에 감동을 줬던 ‘금강산 지게 효자’의 경우다. 당시 40대의 아들 이군익 씨는 92세의 아버지를 지게로 모시고 금강산을 구경시켜 드려 화제가 됐었다. 등산용 알루미늄 지게를 특수 용접해서 지게 의자로 만들어 모셨던 것이다.
 
지게 의자와 아버지의 몸무게까지 60kg이 넘었지만 금강산 비경을 조금이라도 더 보여드리기 위해 험로도 마다하지 않아 이 씨의 상반신은 피멍이 들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에 감동한 중국 산동성의 한 교포 기업인이 이 씨 부자를 중국으로 초청했다.
 
지게 의자가 ‘중국의 금강산’이라 불리는 태산까지 가게 된 것이었다. 이 씨는 5일간 태산으로 아버지를 모시고 다녔다. 중국 언론들은 효경 속의 공자도 감탄할 것이라며 지게 효자를 연일 대서특필했다고 한다. 아들이나 아버지나 더는 여한이 없을 듯하다.

살아가는 동안 가족들과 함께하는 즐거운 추억거리는 얼마든지 다양할 수 있다. 그럼에도 굳이 여행을 들먹이는 까닭은 은퇴하고 나이 들어가면서 가장 하고 싶은 일의 첫 번째가 여행으로 꼽히고 있기 때문이다. 죽기 전에 하고 싶은 일들을 열거하는 ‘버킷리스트’에는 세계적 명소로의 여행이 빠지는 법이 없다.
 
사실 그런 멋진 곳은 혼자 가도, 친구와 둘이 가도 잊지 못할 추억거리가 될 것이다. 그러나 구둣방 아저씨처럼 손자, 손녀까지 일가족이 함께한다면 아마 자자손손 평생 잊을 수 없는 추억으로 이어질 것 같다. 나 자신부터도 즐거이 실행해 봐야 할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시간이 안 맞아서, 비용이 부담돼서 이것저것 핑곗거리로 미루다 보니 문득 아버지 그대로를 답습하고 있는 자신을 보게 되니 말이다. 시간이나 비용이 만만치 않다면 국내는 어떻고, 집 가까운 수도권인들 어떠랴. 장소만이 아니라 시점도 그렇다.
 
죽기 전에 하고 싶은 일이라고 먼 듯이 잡을 게 아니라 남은 생애 중에 가장 젊은 이때, 지금 잡아야 하지 않을까? 현재를 잡아라(Seize the time), 즐기라는 뜻의 라틴어 ‘카르페 디엠’, 바로 그것이다! 봄이 왔다. 쌀쌀한 기운이 가시기 무섭게 여름이 들이닥치는, 이 짧은 봄이 사라져버리기 전에 잡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