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찮은 돌 조각이 만든 빅뱅

"높은 곳에서 공포를 느끼는 걸 고소공포증이라고 하죠? 맨땅에 서 있어도 고소공포증이 올지 모르니 조심하세요(웃음). 우리가 밟고 있는 땅속에는 억만년의 시간이 쌓여 있으니까. 하늘만 높은 게 아니라 땅속도 굉장히 깊거든요."

지질학 박물관을 연상케 하는 전시장 안에서 작가가 농을 건넸다. 전시장 한가운데에 갖가지 돌·유리·세라믹 조각들이 거대한 원형을 이루며 천장에 매달려 있었다. 빅뱅의 순간을 포착한 듯한 이 작품의 제목은 '지구의 중심으로의 여행: 관통할 수 있는'. 작은 조각들을 낚싯줄로 엮어 겹겹이 구를 만들었고, 지구의 핵 같은 중심을 갈라 관객들이 그 사이를 지나다닐 수 있게 했다. 그는 "나무의 나이테가 성장의 역사를 말해주는 것처럼 광물질에도 층이 있다. 그 하나하나의 층이 지구의 시간을 간직하고 있다"고 했다.

멕시코의 설치작가 다미안 오르테가(47)가 서울 소격동 국제갤러리에서 여는 개인전 '풍경 읽기(Reading Landscapes)'는 하찮은 재료 속에 잠재해 있는 예술적 가능성을 포착해낸다. 10여 점의 설치·조각 작품은 유년기부터 흥미를 가졌던 지질학에서 영감을 얻은 것. 그는 "나에게 '풍경'이란 눈에 보이지 않는 땅속 모습"이라고 했다. "아버지가 늘 얘기하셨죠. 텍스트의 중요성은 바로 행간에 있다고. 까만 글자 안에 들어있는 게 아니고요. 물체와 물체 사이에 있는 관계, 저는 그 관계라는 공간에 관심이 있어요."

오르테가는 정규 미술대학을 나오지 않았다.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10년 동안 신문사에서 시사만화를 그렸다. "늘 혼자 일하고 마감에 쫓기는 생활이 힘들어" 그만뒀고, 이후 남미 출신의 현대미술가 가브리엘 오로츠코의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본격 작가의 길을 걸었다. 2002년에는 폴크스바겐의 자동차 비틀을 분해해 와이어로 공중에 매달아놓은 설치작품 '우주의 사물(Cosmic Thing)'을 선보여 화제가 됐다. 미국 클리블랜드 미술관, 런던의 바비칸 센터 등 세계 유수의 미술관에서 개인전을 가졌고 지난해 베네치아 비엔날레 그룹전에도 참여하는 등 현재 남미 현대미술에서 가장 주목받는 작가다.

그는 콘크리트와 벽돌, 알루미늄, 골판지 등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재료를 이용해 작품을 만든다. 지층의 단면을 들여다보듯 겹겹이 재료를 쌓아올린 작품들이 호기심을 자극한다. 마치 땅에서 파낸 파편들로 잃어버린 시간을 재구성하는 고고학자의 작업 같은 결과물이다. 5월 11일까지. (02)735-84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