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처럼 희미했다. 그러나 굴포운하는 역사 속에서 살아있었다. 강을 만들어야하는 숙명이 천년을 내려오며 꿈틀거리다 깊은 동면에 빠져있다. 더 이상 경제적 가치는 사라진 물길, 그러나 그 미완의 강에는 나라와 백성의 쓸쓸하나 엄연했던 현실이 화석으로 남아 있다. 이 겨울 못 이룬 꿈의 흔적에는 눈이 내려 얼어 있다. 털모자를 눌러쓰고 겨울 속으로 물길의 흔적을 더듬어 간다. 가로림만에서 천수만까지….
한 해를 시작하는 시점은 아무래도 머리가 띵할 정도로 차가워야 제 맛이다. 그러나 자전거가 나서는 길은 얼어 있어 쉽게 나서지지 않는 게 이맘 때다. 어느 강이 제격일까. 문득 풍문으로 들었던 충청도의 굴포운하(掘浦運河)가 떠올랐다. 굴착기(포클레인)의 굴(掘)자가 바로 ‘파내다’는 뜻이라고 해야 쉽게 와 닿을까. 굴포는 운하의 또 다른 이름인 셈이다.
희미한 전설, 엄연한 역사 ― 굴포 운하
생소한 이름이다. 웬만큼 국토지리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해도 굴포운하의 존재는 낯설다. 물론 ‘굴포’라는 이름은 오히려 친숙하다. 땅을 파내서 물길을 만든 굴포라는 이름은 도처에서 발견된다.
우선 경인운하 ‘아라뱃길’의 원조도 굴포천이다. 역시 삼남의 조운선이 근해의 바닷길을 타고 올라오면서 강화 손돌목을 지나 만조 때 한강을 따라 서울 용산 경창에 이르는 길이지만 험한 뱃길이었다. 조선조에 파기 시작한 굴포천 운하도 오늘날 부평과 백운 사이의 원통이고개를 뚫지 못해 결국 미완인 상태로 중지되고 만다. 하는 수 없이 김포 고촌 신곡리에서 부평들을 연결하는 60리의 수로를 만들어 직포(直浦) 물길을 완성했다. 그러나 효용은 별로였다. 같은 이름의 ‘굴포운하’가 충남 태안에 있다는 말은 궁금증을 더해주었다. 무슨 사연이 있어 그렇게 운하의 꿈은 사라지고 흔적만 있다는 말인가. 가로림만과 천수만을 이어주는 물길, 그 꿈이 그렇게 말라붙어 있다는 것이다.
참 아름다운 이름, 가로림만
가로림만(加露林灣)이라는 이름은 우선 넉 자의 운이 입안에 상큼하다. 지도를 들여다본다. 호리병 주둥이에 담긴 물길, 그리고 개펄. 어디서부터 출발해야 하나. 남북으로 60리가 넘는 호리병의 깊은 바닥에 돌출한 곶 호리반도가 눈에 들어온다. 호리병 바닥에 호리라니 그럴 듯도 하다. 한자를 일부러 찾아야 하는 형편이니 한글 종씨라도 반갑다.
서산시 팔봉면 호리, 범 호(虎)자를 쓰는 내호리와 외호리가 합하여 호리(虎里)가 되고, 마을의 형상이 입을 크게 벌린 호랑이의 모습이라니 기개가 장하다. 새로운 지명이 ‘범머리길‘로 표현한건 어쩐지 억지스럽다. 동물이니 ‘범대가리길’이라 해야 표준말이나 그도 마뜩찮다. 대가리라 부르면 상스럽게 들리니 아예 동물에게도 ‘머리’라고 존칭을 붙여 준 게다.
이원면 만대항에서 출발하면 가로림만 최북단에서 시작한다는 의미는 있으나 차량들의 홀대를 받으며 지방도를 따라 내려와야 하니 내키지 않는다. 아가리 벌린 호랑이 대가리 근처에서 출발하는 게 물길 따라 가는 서정에도 맞는다.
가로림만을 눈앞에 둔, 멋진 경치를 그냥 놔둘 리 없다. 호리 펜션촌이 어촌을 대신하며 호랑이 정수리를 죄다 갉아 집을 지었다. 호리어항은 그저 행색이 남루하다.
구도항까지 오는 길 십여리는 구릉과 들판과 바다가 번갈아 보인다. 간간이 보이는 트레킹 길손이 한가롭기 그지없다. 걷기열풍이 만든 트레일은 가로림만이라고 예외가 아니다. ‘아라뱃길’의 음운을 차용한 듯한 ‘아라메길’은 팔봉산 아래에서 출발해 솔감저수지와 구도항, 호리를 한 바퀴 돌아 원점으로 오는 22㎞다. 휘적휘적 걷기에 제격인 한적한 바닷길이다.
구도항은 가로림만을 오가는 여객선이 기항한다. 썰물이 되면 배들은 그냥 펄 위에서 하릴없이 물이 들어오길 기다릴 뿐이다. 어촌의 사람들은 겨울한철 비닐하우스에서 추위를 피해 굴까는 작업을 하거나 갯고랑에 붙어있는 감태를 걷는다. 감태는 이즈음 제대로 몸값을 받는다. 소매가가 한 톳(100장)에 3만5000원 가량 하니 어촌에서는 싸다해도 김 값의 서 너 배는 된다. 감태 한 장에 하얀 쌀밥, 그 위에 게장 알을 얹어 먹는 고급음식으로의 변신이 놀랍다. 웰빙시대 최대의 수혜종목이다. 손이 재빠른 사람은 간조 때만 가능하지만 대여섯 톳을 헹궈낸다니 겨울 한철 바닷바람 쐬는 고단함을 감안하더라도 짭짤한 수입이다.
그러나 가로림만의 최대의 고민은 아직 휴화산인 가로림만 조력발전소건설 건이다. 1980년에 후보지로 지정된 이후 30년간 지지부진하다. 태안군 이원면 내리와 서산시 대산읍 오지리 사이에 길이 2020m로 건설되면 520Mw 발전 설비에 959Gw/h의 전력이 생산된다. 찬성하는 사람들은 정작 가로림만의 어민들이다. 5000여 명 중 4000명이 찬성에 서명했다. 호리병 입구에 대산공단이 들어서고 어족자원이 메말라가면서 고육지책이란다. 7년 걸리는 건설에 고용창출이 130만 명, 지방세 수입이 160억 원, 연간 관광객이 176만 명이라는 청사진에 찬동한 것이다. 환경단체를 비롯한 반대론도 거세다. 우선 비용대비 편익이 0.81배에 불과하니 경제성이 없고, 세계5대 갯벌의 하나인 가로림만이 사라지는 것은 절대 좌시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청정에너지가 필요하다면 거기다 풍력발전이나 조류발전을 하면 되지 인공 댐 같은 시설물이 들어서는 조력발전은 환경파괴라는 논리다. 조력발전과 조류발전의 차이를 우리같은 비전문가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밀양송전탑건설 소동에서 보듯 이 아름다운 갯벌 위에서 한바탕 싸움은 간단할 것 같지 않다. 거기다 정치나 이념의 논리까지 버무려져서 뭐가 진실인지 제대로 알기도 어렵겠다. 비관적 환경론자들의 생각 근저에 숨겨진 이해관계까지 덧붙여지면 이 호리병 속에서 또 한 번 소용돌이가 칠게 틀림없다.
가로림만
● 영역 : 서산시 대산읍~태안군 이원면
● 면적 : 해안선 162㎞, 갯벌 81.89㎡(서산쪽 72.6%, 태안쪽 27.4%) 서산시 지곡면 갯벌이 제일 큼
● 규모 : 입구 좁은 지점 3.2㎞, 길이 22㎞
● 지형 : 육지 97%가 50m 이내의 산지이나 대산읍, 원북면 일대에 150~200m의 산지
마을의 장년에겐 희미한 흔적 굴포운하
아라메길은 간척지를 가로지르는 바다둑길을 지나거나 때론 벼랑으로 막히는 길을 지나가면서 자전거와 동행도 무리가 없다. 우선 사람이 없으니까. 634번 지방도가 지나는 둑은 가로림만을 막아 솔감저수지를 만들었다. 지방하천 어은천 물을 가두어 민물이 되었다. 한눈에도 운하 물길은 이 언저리를 지났을 것이다. 그러나 3대를 살아 왔다는 어송리의 김운흥(72) 씨도 정확한 지점을 단번에 가르쳐 주지는 못했다. 팔봉중학교 앞을 돌아 다시 삼원골프레저타운을 지나자 굴포운하터가 나타난다. 큰 배 한 척이 지난다면 꽉 들어찰 좁은 골짜기다.
운하터라는 안내간판이 없었다면 그냥 지나칠 정도다. 천 년 전의 그날처럼, 팔봉산이 동쪽 하늘에서 지켜보고 있다. 그나마 나무다리를 놓아서 미개착의 수풀더미로 가는 길이 이어져 보인다. 유적답사의 힘은 이 미완의 운하, 미완의 강의 흔적을 캐어내고 있는 중이다.
구세군교회 뒤에 있는 인평3리 마을회관에서 만난 노인들은 굴포운하의 전설 같은 파편들을 명료하게 기억하고 있다. 쇠잔한 육신에 비해 그들의 기억은 또렷하고 나그네의 관심에 더욱 신명이 난다.
미스터리 3km 구간, 미완의 강, 그 꿈
이제 역사서 속에 잠자고 있는 굴포운하의 얘기를 따라가 볼 차례다. 1096년 고려 숙종조에 이미 운하에 대한 논의가 있었으니 필요는 훨씬 더 이전으로 거슬러간다고 보겠다. 고려사의 기록에는 인종 때 실제 시공이 이루어졌다고 되어있다. 내시 정습명을 파견하여 운하를 팠는데 완성이 10리(4㎞)요, 미완성이 7리(3㎞)였다. 안흥량 400리를 안돌아가도 되어 참으로 좋은데, 파는 대로 메워졌다고 한다.
안흥량이란 ‘량(梁)’이 험한 물길을 뜻하니 우리나라 4대 난행량(難行梁, 지나다니기 어려운 바닷목길)중 하나다. 황해도 장산곶, 강화도 손돌목, 태안 안흥량, 진도 울돌목이 악명 높았다. 어느 시대나 조정(정부)의 재정은 곡식으로 충당되었고, 우리나라는 삼남곡창이 그 대부분을 부담했다. 육로는 어려웠고, 조운선을 띄운 해로수송이야말로 절대적이었다. 안흥 앞바다(안흥량)는 죽음의 바다여서 노련한 뱃사공도 꺼릴 정도였다. 조선 태조 이후 60년간 통계가 말한다. 난파한 선박이 무려 200척, 사망 1200명, 가라앉은 곡물 1만5800석이니 안흥량은 저승길이었다. 이러한 조정의 고민은 고려 말 공양왕, 조선 태종에 이르면서 시도에 시도를 거듭해 5개 저수지를 만들고 갑문식 운하로 추진했으나 실효가 없었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신숙주는 ‘신동국여지승람’에 굴포운하의 실패를 한탄하는 시를 남겼겠는가. 태안군지의 번역을 좀 가다듬어 다시 읽어보니 처연하다.
실제 400여년에 걸친 운하의 고민은 선조때 ‘설창육운안(設倉陸運案)’이 채택되면서 끝나는 듯 보였다. 천수만을 거쳐 온 세곡을 남창에서 하역하여 하창, 중창을 지나 북창에서 머무르게 했다. 가로림만으로 해서 한양으로 가져가도록 했다. 그러나 그도 하역과 적재 과정에서 지방 관리의 부패 문제로 이내 폐지되고 만다. 지금 인평리와 도내리 일원엔 하창, 중창과 북창이 이름으로만 살아 있다.
학자들은 진단한다. 굴포운하가 실패한 것은 첫째는 벌(개)흙과 화강암 토질의 문제이고, 둘째로 조수간만의 차가 심한 서해바다, 셋째로 빈약한 건설도구 때문이라고 하는 것이 정설이다. 그러나 1630년대에 안면곶을 파서 운하를 내고 안면도를 섬으로 만든 것을 보면 단지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운하를 만들게 되면 그동안 누리던 부패의 기득권을 잃게 되는 탐관오리들의 교묘한 역주행이 큰 원인이었다고 진단한다. 소수의견이라도 꽤나 흥미 있는 분석이 아닐 수 없다. 그 부역이 얼마나 힘들고 심했으면 도망자가 속출했는데 이들이 태안 곳곳의 구릉에 산촌(散村)을 이루며 오늘날도 살아가는 태안 사람들의 선조라는 것이다.
미수(米壽)인 인평3구 가재혁 할아버지의 기억은 또렷했다. 그는 숲이 무성한 골짜기를 가리키면서 그 뒤에 신털이봉이라는 야산이 있다고 했다. 굴포운하 공사를 하던 옛사람들이 하루 일을 마치고는 신털이봉에 올라 짚신의 흙을 털었다는 얘기가 전해내려 온다고 웃는다.
둘로 나눠진 천수만의 물길, 부남호와 간월호
굴포운하를 잇는 흥인천은 인평저수지를 거쳐 부남호로 흘러든다. 천수만으로 가는 물길을 제대로 따라가려면 국도 32호를 잠시 따라가다 평천4리 정류장에서 들판으로 들어선다. 이 물길은 또하나 상옥천이다.
부남호는 태안군 남면과 서산시 부석면의 앞 글자를 딴 이름이다. 부남호는 워낙 넓어서 10㎞를 달려가야 천수만 B지구 방조제에 이른다. 1월 초순, 겨울 철새도 이즈음에는 뜸하다. 철새들은 더 남쪽으로 날아갔다가 1월 하순이 되어야 다시 북상하기 위해서 이곳에 들른단다. 사람 하나 만날 수 없는 비포장길의 외로운 자전거는 황량하다 못해 무섭기까지 한 들판과 물길을 달린다. 그로부터 한 달도 지나지 않아 온 나라가 AI조류독감으로 난리가 났다. 당국의 안이한 대응이 화를 키웠다고도 하고 살처분의 공포가 밀려왔다. 언제는 철새가 사람이 살 수 있는 자연환경의 건강을 말해주는 지표라고 하더니 조류독감을 옮기는 원흉이 되어버렸다. 실은 먹을 게 부족한 가창오리 떼가 오리사육농가 근처의 사료를 기웃거리다가 오히려 AI조류독감에 감염되었다는 추정도 있다. ‘먹이를 주느냐 마느냐’는 논란 속에 철새는 이래저래 억울하다.
수직이다. 굽은 길이 없다. 간간이 사진을 찍으려 강둑으로 올라서지 않으면 그저 일망무제의 들판이다. ‘정주영 공법’이 만든 의지의 승리다. 갯벌을 뭐 하러 막아서 천혜의 효용을 없앴느냐고 묻는 것은 적어도 지금은 사치처럼 보인다. 여기서 주인은 새들이다. 웬만큼 소리를 질러도 날아가지 않는다.
한 어부가 그물을 고치고 있다. 팔봉산 너머 서산 지곡면에 산다는 그는 출퇴근하는 어부다. 그는 기업농 ‘현대시절’을 그리워하고 있다. “항공기로 볍씨를 뿌리던 직파시절이 훨씬 친환경이지요. 논둑에까지 벼가 자라니까 콤바인이 베지 못한 벼를 먹으러 철새들이 지천으로 몰려들었지요. 이제 개인에게 전부 불하하고 나니 농약을 더 쓰는 거라. 항공방제가 오히려 맹독농약을 더 안 쓰지요. 그땐 미꾸라지가 지천이었는데 이제는 미꾸라지가 귀해졌어요. 그땐 볏짚도 전부 썰어서 그대로 퇴비로 만드는데 지금은 다 사료로 팔아서….”
기공식으로 끝난 관광레저형 태안기업도시의 꿈
2007년 10월, 충남지방경찰청장이던 나는 분주했다. 천수만 부남호반에 태안기업레저도시 기공식 경호를 준비하고 있었다. 100층짜리 국제비지니스센터에다, 테마파크와 첨단복합단지가 요트 선착장과 맞닿아 있는 광활한 신도시의 청사진은 장밋빛을 넘어 황홀했다. 천지가 개벽할 듯 현지주민들은 모두들 가슴이 벅찼다. 노무현 대통령을 모신 오색의 발파연기는 그날 사라지고는 그뿐이었다. 흡사 기획부동산의 감언에 속은 듯 땅은 묵어갔다. 이제 막 문을 연 18홀 골프장으로 세월 값을 셈하기에는 너무 허무했다. 부남호 건너 저편으로 드러눕는 석양이 차갑다.
B지구 방조제가 부남호의 끝 창리다. 거기서 십리 남짓을 가야하는 간월도가 A, B지구 방조제의 대칭점이다. 안면도로 가는 길의 반대편이지만 간월도를 들리지 않는다면 그것 또한 억지스럽다. 천수만의 밀물과 썰물로 이어지고 끊어지고를 반복하는 간월암은 그 존재 자체로 귀한 이정표다. 영양굴밥을 양념장에 비벼 서산 어리굴젓을 얹어 맛있게 먹어야 반환점을 돈듯하다.
육지가 섬이 된 사연, 안면도
가로림만 굴포운하에 실패한 조선조는 다시 소원면 의항리와 송현리를 잇는 개미목판개(운하)를 거의 다 파놓고도 제대로 운항도 못해본 채 막혀버리고 말았다. 주저앉는 개흙에 당시의 공법이 맥을 출 리가 없었다. 중종 32년(1537년)의 일이다. 또다시 꿈이 된 뱃길, 의항(蟻項) 운하다.
천수만 건너 보령사람 토정 이지함(1517~1578)이 안면곶에 들러 예언했다. “나중에 누군가가 안면곶 뒷줄기를 파내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예언은 100여년 뒤 적중한다. 바로 태안군 남면 신온리와 안면읍 창기리 사이를 곡괭이로 파서 운하를 만든 게 1647(인조 25년)어간에 충청관찰사 김육이다. 바닷길 60㎞를 단축했으나 거센 바다 안흥량을 피하지는 못했다. 1970년 안면대교가 완성되었으니 섬으로 끊긴지 320여년 만에 다시 이어졌다. 또 안면도의 남쪽 영목항에서 대천을 잇는 전장 14㎞의 국도 77호선 연육교 공사가 한창이다. 게다가 6.9㎞에 이르는 해저터널이 완공되는 2020년이 기대된다. 이래저래 소나무도 졸고 있고, 파도도 잠잔다는 안면도도 잠을 설치게 될게 분명하다.
<참고자료>
1. 태안군지, 2012, 태안군지편찬위원회
2. 태안반도 가적운하의 역사지리적 검토, 이준선
3. 한국의 섬 이야기⑼ 충남 태안 안면도, 변남주(목포대 도서문화연구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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