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니어 에세이] 박수근 탄생 백 주년 기념전 - 가나인사아트센터

봄날의 안개 같은 색이 귀갓길 내내 나를 따라오고 있었다. 그날은 십여 년의 투병생활을 마치고 세상을 떠난 오래전의 친구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네는 날이기도 하였다. 연한 녹색과 밝은 회색빛이 함께 어우러진 화면은 꿈속이기도 하였고 우리가 걸어가던 실제의 풍경이기도 하였다.
 
친구의 모습이 겹쳐지면서 나타나는 혼돈의 빛이다. 어둠의 빛이다. 혼돈과 어둠이 그려가는 작품에서 찾아가는 작은 희망의 추억하나를 잡아본다.

바라보는 시선은 언제나 순간의 감정에 따라 희망이 되기도 하고 슬픔이 되기도 하는, 그래서 작가의 의도와는 다르게 내 마음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박수근 화백이 지니고 있는 그림 속 세상은 소설가 박완서 선생님의 표현처럼 시대의 짐을 짊어진 나목으로 조용히 봄을 기다리는 변형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한국 근현대 미술사에서 가장 한국적이고 독자적인 개성을 지닌 그림을 그린 작가로 평가받고 있는 박수근 화백(1914~1965)의 100주년 탄생 기념전에서 그의 그림을 만났다.

화면을 가득 메우고 있는 빨래터의 여인들, 아이 업은 소녀, 시장 사람들로 이어지는 그림의 간결한 선을 바라본다. 명태 몇 마리가 놓인 도마에서 만나는 오래전 어머니의 부엌이다. 굴비가 귀하던 시절에 두 마리의 굴비는 잊고 있었던 어머니의 사랑으로 초교 시절의 내 양은도시락 속 반찬으로 형태의 변형을 시도한다.
 
아끼던 굴비를 기름에 튀겨 뼈를 발라서 도시락에 넣어주시던 어머니의 사랑을 그때는 몰랐다. 오래전에 깨닫지 못했던 어머니의 사랑이 그림에서 사랑의 형태로 내 마음에 자리한다. 명작이란 이렇게 시간이 흘러도 진솔함의 애정을 품고 우리 일상의 곳곳에 숨어 있다가 다시 깨우침의 시간을 선물하는 것인가에 생각이 머물면서 바라보는 작품에는 시간을 뛰어넘는 감동과 울림이 걸음을 느리게 만든다.

“나는 그림 그리는 사람입니다. 재산이라곤 붓과 팔레트밖에 없습니다. 당신이 만일 승낙하셔서 결혼하여 주신다면 물질적으로는 고생이 되겠으나 정신적으로는 당신을 누구보다 행복하게 해 드릴 자신이 있습니다. 나는 훌륭한 화가가 되고 당신은 훌륭한 화가의 아내가 되어 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25세의 박수근 화백은 17살의 여고생을 만나 첫눈에 사랑에 빠졌다. 박수근 화백의 아내 김복순 여사는 초교 졸업이 학력의 전부인 가난한 미술교사를 선택한다. 박수근 화백의 그림 속 모델이 되기도 하였던 아내 김복순 여사는 이미 의사와 정혼이 되어있는 유복한 가정의 17세 여고생이었다고 한다.
 
“나는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려야 한다는 예술에 대한 대단히 평범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내가 그리는 인간상은 단순하고 다채롭지 않다. 나는 그들의 가정에 있는 평범한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물론 어린아이들의 이미지를 가장 즐겨 그린다.”는 박수근 화백을 17세 여고생은 인생의 동반자로 선택한다.
 
아내에게로 향하는 사랑과 아내가 지니고 있는 사랑의 힘으로 그림을 그려간 내면의 세계를 바라본다. 여인들이 작품의 많은 주제가 되어 있는 그림들은 작가 자신이 그림으로 표현한 변형된 사랑의 모습이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그가 담아가던 미술의 세계에서 바라보는 삶의 진솔함이다. 간결하면서도 유연하게 흐르고 있는 선의 흐름은 완벽한 스케치로 바라보는 시선이 아니면 그려질 수 없는 선의 굴곡을 지니고 있다. 각진 선으로 표현된 신체의 흐름이 지니고 있는 유연성이 놀랍다.
 
일관되게 그려나간 선의 흐름과 독특한 색채로서 인간의 모습을 일상에서 형상화하였다. 어둡고 음울하여야 하는 회색빛을 띠고 있는 흐린 녹색의 그림 속 세상은 운치를 지니고 꿈으로의 연결을 시도한다. 어린 날에 즐겨 꾸던 꿈속의 세상을 만나는 것 같은 환상의 세상이 되기도 한다.‘
 
고무신에 담긴 추억의 시간이 그리움의 추억이 되고 그 시절을 함께 걸어가던 사람들에겐 나의 어머니가 되고 나의 누이가 되는 눈물겨운 작품 속의 세상이다. 인간이 그릴 수 있는 현실의 모습에서 바라보는 희망은 작은 한 마리 새가 되어 모습을 나타낸다.
 
새가 날아다니는 숲에는 붉은빛을 띄우고 귀하게 자라고 있는 열매가 되어 그것은 우리들의 고달픈 현실에서 희망이 된다. 사람이 살아가는 생존의 본능이 그림으로 나타나서 우리네 일상들에서 빼앗긴 아버지의 권위와 사회현실이 서로가 이루어가는 공감대를 지니고 있다.
 
전쟁이 끝난 후 삶의 터전을 잃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떠나간 빈자리에서 바라보는 고달픔과 아픔이 그림에서 내가 되고 네가 되어서 위로의 손을 내밀고 있다. 1950년에 즐겨 사용하던 특별한 색에서 그가 지니고 있는 예술의 세계와 현실의 세계가 만나 꿈결 같은 세상이 되어 우리 곁으로 다가온다.
 
1960년대가 되어서야 작은 희망을 품고 있는 것 같은 원색이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그가 신혼 시절에 살았던 창신동의 판잣집에서 조금 더 현실은 희망으로 변해가고 있는 것이 아니었던가 나름의 추정을 하여본다. 전시장에 전시된 그의 그림은 일관된 색과 일정한 선의 흐름을 유지하면서 그의 감성이 지니고 있는 생활 속의 시간으로 우리를 이끌고 간다.
 
채도가 낮은 연두색과 짙은 녹색으로 어우러지는 화폭은 문지르고 다시 그리고를 반복하면서 화강암의 질감을 지니고 있는 마티에르의 기법으로 어두운 회색과의 조화로 마치 꿈길을 거니는 것 같은 상상의 세계를 제시한다.

화폭에 담긴 시간의 모습은 그때의 사회현실로 우리를 끌고 가면서 암울함과 함께 시간이 흐르고 푸른 녹색의 나무들로 모습을 보이는 채색으로 시대적인 희망을 함께 읽어간다. 그림으로 바라보는 상상의 세계에서 그 시대가 지닌 사회적인 모습을 바라볼 수 있음이 신기하지만, 그것은 색이 아닌 강렬한 대비를 위한 하나의 효과음이 되어주기도 한다.
 
그림속에서는 어디선가 우리가 걸어가던 봄날의 노래가 들려오는 것 같기도 하고 새들의 푸드득 소리가 들려오기도 하는 것 같은 환상에 빠질 수 도 있다. 작가의 그림으로 읽어가는 형태와 색채에서 찾아가는 시대의 대비음이다.
 
추상으로 표현되는 작가가 지니고 있는 상상의 세계에서만 가능하다고 생각하였던 아름다운 미적 체험이 현실의 그림으로 바라보는 구상화에서도 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아간다. 예술이 지니고 있는 본질은 언제나 과거의 것으로 흘러가고 있지만, 그 시대의 흐름이 지니고 있는 가치가 특별함의 시간으로 모습을 나타내던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