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 스토리] 비교 테스트서 美製 먹통된 순간, 우리가 만든 무전기는…

1989년 봄, 습기를 가득 머금은 하늘이 이슬비를 뿌리기 시작했다. 조용하기만 한 의정부 미군부대 내 막사 안은 군인과 연구원 등 수십 명이 내뿜는 열기로 가득 차 있었다. 모두가 탁자에 놓인 무전기 두 대를 응시했다. 그중 몇 명은 비디오를 찍고, 두세 명은 시험 기기를 조작했다. 통신병이 정적을 깨며 말했다. "이제 재밍(jamming·방해 신호 송출)을 걸겠습니다."

손에서 땀이 났다. 두 무전기 중 하나는 미국산 장비, 하나는 내가 10여년째 몸담은 국방과학연구소(ADD)가 만든 장비였다. 국방부 특별검열단 심사위원들은 두 제품에 재밍을 걸기 시작했다. 방해 신호 속에도 두 제품의 무전 통화는 끊기지 않았다. 이어 스위핑(sweeping·외부 도청을 위해 무전기 주파수를 찾는 것)을 시도했다. 둘 다 도청은 되지 않았다. 우열을 가리기 힘든 상황이었다.

그러자 심사위원들이 재밍 파워를 3단까지 올렸다. 그 순간 미국 장비는 먹통이 되고 우리 장비는 쌩쌩하게 잘 돌아갔다. "와~" 하는 함성이 터져 나왔다. 국산 장비 도입을 반대했던 사람들은 '이럴 리가 없다'며 두 번, 세 번 실험을 했다. 특검단은 모든 과정을 비디오로 찍었다. 우리 제품이 미국 제품보다 성능이 좋다는 것이 확실하게 검증된 것이다. 최종 판정이 나오자 나는 미군부대 한 구석에서 감격에 찬 ADD 직원들과 서로 부둥켜안고 엉엉 울었다. 개발 과정에서 겪었던 수많은 난관이 눈앞을 스치며 저절로 감격의 눈물이 터져 나왔다.

ADD는 나에게 '마음의 고향'과 같은 곳이다. 이곳은 국방에 필요한 병기와 장비의 연구·개발 및 기술 지원을 하는 연구소로 1970년 7월 설치됐다. 나는 1982년부터 1991년까지 근 10년간 이곳에 연구원으로 몸담았다. 미국에서 10여년간의 유학 생활과 현지 직장 생활을 마무리하고 한국에서 처음 취직한 곳이 바로 ADD였다.

미국에서는 NASA(미 항공우주국)의 위성을 만드는 일에 참여하고 땅속과 해저 잠수함의 무선 라디오 시스템도 설계하며 다양한 경험을 쌓았다.

현지에서 안정적인 생활을 이어가던 도중에 언제부턴가 나도 모르게 가슴 깊숙한 데서 애국심이 조금씩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조국에 뭔가 보탬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군(軍)에 몸담고 있던 형(이상훈 전 국방부 장관)이 "미국에서 쌓은 좋은 경험을 나라를 위해서 써야 하지 않겠느냐"고 권유했다. 귀국을 결심했다. 1981년 말이었다.

ADD에 근 10년을 있으면서 내가 최초로 개발 책임을 맡은 것이 차세대 군용 무전기 사업이었다. 정해진 주파수로 송·수신을 하는 일반 무전기 대신 거의 무작위로 주파수를 바꿔가며 적의 통신 교란이나 도청을 피하는 최첨단 무전기였다.

이 무전기는 미국도 1985년에야 개발에 성공했을 정도로 기술적 난도가 높았다. 당시 전 세계에서 미국·영국·이스라엘 3개국만 보유 중이던 첨단 제품이었다. 가격은 대당 1만달러. 우리나라에 10만대 정도가 필요했는데 돈으로 환산하면 무려 1조원에 육박했다. 국산화가 절실했다.

그런데 무전기를 어느 정도 개발하니 여기저기서 압력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무기 중개상의 음해와 투서로 감사원의 감사까지 받았다. 모두 무혐의로 드러났지만 당시엔 견디기 어려웠다. 급기야 윗선에서 '무전기 개발 중지' 지시가 내려왔다. 나는 무전기 시제품을 들고 장관실을 찾아가 담판을 지었다.

"제발 우리 것과 미제 무전기를 비교 테스트할 기회만 주십시오. 그러면 더 이상 다른 말 하지 않겠습니다."

결국 국방부 특검단의 테스트를 받게 됐다. 만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순수 국산 기술로 미국 장비를 당당하게 꺾은 그날 그 순간을 나는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이 군용 무전기가 나중에 상업적으로 적용된 것이 바로 우리나라가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갖고 있는 CDMA(부호분할다중접속) 기술이다. 이것이 내 인생에서 맞은 첫 번째 '최초'의 기록이었다. 도전에 당당하게 맞서 승리를 손에 쥐었을 때의 기쁨, 무언가를 처음으로 만들었다는 희열(喜悅)이 이후에도 수없이 많은 '최초'에 도전하는 원동력이 됐다. 차기 FM 무전기, 차기 전술 통신 체계, 차기 지휘 통신 자동화 체계(C4I)…. ADD에 몸담으면서 내가 개발한 장비의 앞엔 모두 최초를 뜻하는 '차기(次期)'가 붙었다. LG유플러스 CEO(최고경영자)를 맡고 나서도 늘 새로운 목표에 도전하는 중이다.

어릴 적 아버지는 "새벽 길을 걷는 사람은 바짓가랑이가 젖는다"고 여러 차례 말씀하셨다. 남이 걷지 않는 길을 걸으니 바지가 이슬에 젖는다는 뜻이었다. '최초'는 누구에게나 두렵고 망설여지는 단어다. 그럴수록 피하지 말고 즐겨야 한다. 그러면 그 도전이 인생의 활기를 불어넣는 청량제(淸凉劑)가 될 것이다.


[통신업계 대부 이상철 부회장은]

이상철(李相哲·66) LG유플러스 부회장은 온화한 인상과는 달리 사업에서는 저돌적 면모를 보이는 CEO(최고경영자)다. 2010년 LG텔레콤과 LG데이콤·파워콤을 하나로 통합한 LG유플러스의 첫 CEO로 취임했다. 통신업계 3위 사업자이지만 ‘LTE 전국망 구축’ ‘LTE 데이터 무제한 요금제’ 등을 처음으로 발표했다. 작년에는 영업이익이 전년보다 327.7% 상승한 5421억원을 기록, 통신 3사 중 유일하게 세 자릿수 성장률을 기록했다.

국방과학연구소(ADD)를 비롯해 KT·KTF 사장, 정보통신부 장관, 광운대 총장 등 민·관·학계를 두루 거쳤다. 삼국지를 비롯한 중국 고전(古典)은 물론 관상학·역학(易學)·바둑에 조예가 깊다.

‘IT(정보기술)가 장애인에겐 새로운 창(窓)이 될 수 있다’는 신념으로 2004년부터 10년째 한국장애인재활협회 회장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