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 스토리] "남의 불행 이용해 得보는 건 正道 아니다" 가르쳐준 '스승'

"귀하는 신한금융그룹의 회장 후보자로 추천되었습니다." 2011년 2월 어느 날, 나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돈을 잘 버는 금융그룹의 회장 후보가 되었다는 전화를 한 통 받았다. 그리고 얼마 후 나는 신한금융그룹의 회장이 되었다.

회장으로 취임하기 전, 나는 신한생명의 사장과 부회장을 끝으로 40여 년의 금융인 생활을 마무리하고 2년여 동안 야인(野人)으로 돌아가 있었다. 사람들은 은행장도 못 되고 야인으로 물러났던 내가 그룹의 회장이 되자 "관운이 있는 것 같다"는 말들을 한다. 그때마다 나는 "운(運)보다는 인연의 덕이라고 생각합니다"하며, 내가 지금의 자리까지 오를 수 있었던 원동력을 얘기하곤 한다.

여기서 개인사를 잠깐 얘기할까 한다. 한창 꿈과 희망에 부풀어 있던 대학 1학년 때 어머니께서 위암으로 돌아가셨다. 갑작스러운 어머니의 죽음은 나에게 큰아픔으로 다가왔고, 생활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모든 법대생의 꿈이자 희망인 고시 공부에 전념할 수 있도록 뒷바라지를 해줄 사람도 없었고, 오히려 장남인 나는 동생들을 돌봐야 하는 형편이었다. 하루라도 빨리 사회에 진출해 아버지와 함께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할 상황이 되었다. 그리고 얼마 후, 아버지가 재혼하시면서 집안은 어딘지 모르게 어수선해졌고, 분위기도 예전과 같을 수 없었다. 가정형편이 이렇다 보니 고시와는 거리가 멀어질 수밖에 없었고 동기생들의 잇따른 고시 합격 소식에 축하를 보내면서도 마음 한구석에는 늘 허전함이 자리 잡고 있었다.

내 꿈을 채 펼쳐보지 못했다는 아쉬움을 가슴에 담고 서울신탁은행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은행 현장에서 업무를 시작한 지 1년이 안 되는 시점에 여신 관리를 전담하는 '관리부'로 발령을 받았다. 그때 맡았던 일은 법대 출신이라는 이력 때문인지 대출 사후 관리에 해당하는 담보 관리, 경매 진행, 명도소송(明渡訴訟) 등의 일이었다. 그러던 어느 추운 겨울날, 명도소송을 집행하다 집에서 쫓겨나는 가족을 직접 목격하게 되었다. 마음이 너무 불편했다. 법에 따라 하는 일이었지만, 가슴 아픈 가족을 보는 게 마음 아팠고, 그 일 때문에 결국 나는 첫 직장을 나오게 된다.

짧은 첫 직장 생활이었지만, 그곳에서 나는 인생에서 잊지 못할 소중한 인연을 만났다. 바로 고(故) 한기선(1936~ 2007) 범양상선 회장님이다. 서울대 법대 선배였던 한기선 당시 서울신탁은행 관리부 차장은 내게 업무의 멘토이자 직장 생활의 예절을 가르쳐준 스승이었다. 나는 직장을 옮겨 신한은행에 와서도 고인을 계속 찾아뵙고 식사를 하며 만남을 이어갔다. 한번 맺은 인연을 소중히 간직하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우연치고는 참 깊은 인연이었을까? 이 인연은 1990년 후반 내가 신한은행 상무로 재직할 때로 이어졌다. 범양상선이 발주한 선박을 건조하던 조선사가 인도(引渡) 직전 부도가 나서 신한은행에 손실을 입힐 수밖에 없게 되었다. 나는 홍콩으로 날아가 채권단을 설득해 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때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당시 범양상선 회장으로 일하시던 고인을 찾아갔다.

조선사가 법정관리에 들어가면 계약서상 범양상선은 선박을 싸게 살 수 있어 아쉬울 게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고인께서는 남의 약점·불행을 이용해 이득을 보는 것은 정도(正道)가 아니며, 배는 이미 만들어졌으니 계약 조건대로 이행을 잘해 조선사의 영업을 정상화하는 것이 함께 사는 길이자 국가를 위하는 길이라고 말씀하셨다. 결국 선박을 원래 계약대로 인수해 주셨고, 그 덕분에 조선사는 살아났으며, 신한은행도 손실을 피할 수 있었다. 사람들이 흔히 얘기하는 대의(大義), 정도(正道) 경영이 무엇인지 피부로 느끼고 배울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경험은 내가 회장이 되어 신한금융그룹의 미션을 '금융의 힘으로 세상을 이롭게 한다'는 '따뜻한 금융'으로 정하게 되는 데에도 바탕이 되었다.

나는 인연을 '의지가 만들어낸 운명'이라고 생각한다. 운명을 잡느냐, 그냥 흘려 버리느냐에 따라 인연의 깊이가 달라지는 것이고 인생이 180도 달라질 수도 있다.

친구 중에는 나를 안정적인 금융업을 선택해 쉽게 성공했다고 평가하는 사람도 있고, 운이 좋아서 이 자리까지 왔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요즘같이 복잡한 세상에 '쉽고, 경쟁이 없는 직업' '운만으로 이루어지는 성공'이 어디 있을까?

세상살이가 권력·명예·부귀를 좇는 것이 다가 아니다. 진실한 마음으로 인간관계를 맺으려 노력하고 묵묵히 자기 길을 가는 것, 이것이 성공에 가까이 가는 길이라고 확신한다.

[40년 금융 외길 한동우 회장은]

한동우(韓東禹·66) 신한금융지주 회장은 부산에서 태어나 부산고와 서울대 법학과를 졸업했다. 1982년 신한은행 설립에 참여한 신한은행 원년 멤버이다. 1983년 지금의 종합기획부장격인 기획조사부장을 시작으로 인사부장 등 요직을 두루 거치며 1999년 부행장이 되었다.

승승장구하던 한 회장은 은행장 경쟁에서 밀려 신생 계열사인 신한생명 사장으로 옮기는 시련을 겪었다. 하지만 그는 이에 실망하지 않고 보험 영업에 나서 만성 적자였던 신한생명을 흑자로 돌려세웠고, 2009년 신한생명 부회장을 끝으로 물러났다.

한 회장은 '신한 사태'로 최고경영진 공백이 생기면서 2011년 3월 신한금융지주 회장으로 화려하게 복귀했다. 그는 취임 첫해에 국내 금융권 최초로 당기순이익 3조 클럽에 가입시키는 경영 능력을 보여줬다.

한 회장은 손자병법에 나오는 '무지명(無智名) 무용공(無勇功)'이란 구절을 가슴에 품고 산다. '전쟁에서 승리하는 장수는 큰 명성도 용맹한 공적도 없다'는 뜻으로, 한 회장은 "한발 앞서 준비하고 자신의 길을 가다 보면 반드시 진가를 드러낼 날이 온다. 생색내지 않으면서 묵묵히 자기 할 일을 하자"고 임직원들에게 조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