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4.04.30 09:52

Essay

시니어 전문 포털 사이트 ‘유어스테이지(www.yourstage.com)’에서 활동하는 한 시니어리포터의 글을 소개한다. 여러 독자를 가슴 뭉클하게 한 글이다.

즐겨 바르던 립스틱이 떨어졌다. 친구가 안 쓰는 거라며 준 립스틱이었다. 생각해보니 내 돈 주고 립스틱을 사본 적이 한 번도 없는 것 같다. 전부 시누이들이나 친구들에게 물려받거나 선물받아 썼으니 말이다. 여태까지 내게 어울리는 색깔이 뭔지조차 모르고 있다 드디어 마음에 드는 색을 발견한 것이 이 녀석이다. 하지만 이제 똑 떨어졌다. 혹시 어디 안 쓰는 립스틱이 없는지 주변을 뒤졌다. 다행히 화장대 서랍에서 립스틱 한 개가 나왔다. 그런데 하필 검은색이다. 검정 립스틱이 있었나? 잘 기억은 안 나지만 바르고 몇 초 있으면 붉은색으로 변할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순진한 생각이었을까. 검은 입술은 시간이 지나도 아무 변화가 없었다. 끝끝내 검은색 그대로였다. 나는 항상 바쁘게 화장을 하는 편이다. 색깔이 변할 때까지 참지 못하고 그 위에 다른 색을 덧입혀 바르곤 한다. 그래서 내가 검정 립스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겠다 싶었다. 유행에 둔한 내가 미처 모르는 사이 검정 립스틱이 널리 퍼진 게 아닐까. 그래서 나도 하나 가지고 있는 것이리라. 그렇게 믿고 싶었다.

어느 날 저녁이었다. 기운도 없고 노곤해서 보리밥이나 먹을까 하고 외출을 하려는데 희끗희끗한 내 머리가 눈에 띄었다. 모자를 쓰면 감쪽같겠지만 식구들끼리 밥 먹으러 가면서까지 거추장스럽게 그럴 필요가 있나 싶었다. 언젠가 이럴 때 쓰려고 산 게 하나 있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어디에 뒀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대신 그 검정 립스틱이 또 눈에 띄었다. 모처럼 시간 여유도 있으니 멋쟁이 검정 립스틱이나 발라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에는 붉은 색깔로 변할지 모른다는 기대로 그 검정 립스틱을 다시 발라보았다. 오래 바르고 있으면 어떻게 되는지 확인하고 싶어진 것이다. 하지만 요지부동인 검정 립스틱. 아무리 기다려도 붉은색으로 변하지 않는다는 걸 확인하고 기대를 접었다. 검게 물든 입술을 티슈로 닦아내는데, 이 불길한 예감. 너무 쉽게 지워지는 게 립스틱 질감이 아니었다. 문득 생각났다. 이게 립스틱이 아닌, 내가 좀 전까지도 그토록 찾던 새치 커버용이라는 걸. 저가 생활용품점에서 산 기억까지 불현듯 떠올랐다. 그때 갑자 기 튜브형 염모제를 치약으로 알고 칫솔에 듬뿍 발라 양치질을 하던 엄마가 생각났다. 아흔 살 엄마가 했던 실수를 내가….

내가 고스란히 엄마의 뒤를 밟고 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묘했다. 그런 엄마를 그렇게 구박했던 과거가 떠오르니 회한이 솟구친 것이다. 염색약으로 양치질했어도 아무렇지 않은 걸로 그 약의 안전성을 입증했던 엄마. 싸구려 새치 커버용 스틱을 입술에 발랐어도 역시 아무렇지 않은 나. 나도 모르게 “엄마” 하며 눈물이 나왔다. 앞으로 얼마나 더 이런 식으로 엄마의 전철을 밟게 될까. 사무쳐서 한참이나 베개를 적셨다. 그래서였을까. 모처럼 꿈에서 엄마를 만났다. 엄마는 10년쯤 전에 거금을 들여 장만해준 모직 점퍼를 입고 싱크대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그런 엄마를 내가 뒤에서 껴안았다. 젊은 연인들처럼 ‘백허그’를 한 것이다. 엄마는 돌아서서 점퍼를 벗었다. 점퍼 속에는 허름한 한복을 입고 있었는데 저고리 밑에는 흰 러닝셔츠가 삐져나와 있고 치마도 깡총해서 속바지가 다 보였다. 옷고름은 꽤 야무지게 맨 채였다.


난 엄마에게 검정 립스틱 사건을 설명하며 열심히 웃었고, 그런 나를 보며 엄마도 즐거워했다. ‘이제 너도 내 속 알겄지야?’ 하는 표정이었다. 별다른 스토리 전개 없이 그냥 한두 장면만 있는 꿈이었는데 엄마를 만난 여운은 오래갔다. 엄마가 아흔 살 넘어 했던 실수를 어느새 따라 하고 있는 내가 무섭고 끔찍하지만 그렇게라도 엄마의 딸인 걸 증명할 수 있어 좋다. 그렇게 생각하련다. 영락없이 립스틱 모양인 새치 커버용 스틱. 이걸 쓰는 여자들 대부분이 내 또래일 텐데, 같은 실수를 나 말고도 여럿 했을 것 같다. 고로 이 디자인은 실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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