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 스토리] 초등 2학년 때 '호랑이골'에서 등골 오싹한 일 겪은 뒤…

60년 넘는 삶을 돌이켜보면 내 인생의 큰 방향은 초등학교 2학년 때 결정됐다. 나는 경북 성주에서 7남매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집안 장손인 형님에게는 학업에 전념하도록 온 가족의 열렬한 지원이 있었다. 넉넉잖은 집안에서 나는 공부보다 집안 농사를 돕는 게 우선이었다. 방과 후에는 매일 큰 황소를 몰고 산으로 가서 풀을 먹이고 집에 돌아오는 것이 일과였다.

초등 2학년 어느 초여름 날이었다. 여느 때처럼 수업을 마치고 꼴망태와 책 한 권을 들고 친구들과 함께 소를 끌고 풀을 먹이러 산으로 갔다. 소가 풀을 먹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자리를 잡고 친구들과 신나게 노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그러는 사이 어느덧 날은 저물어 집에 갈 때가 다 됐다. 그런데 있어야 할 소가 보이지 않았다. 소가 집의 전 재산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허겁지겁 찾아 나섰다. '여우골' '늑대골'…. 여우나 늑대가 자주 나온다는 계곡을 훑고 다녔다. 골짜기가 깊어질수록 어둠은 짙어지고 무서움도 커졌다. 어린아이가 혼자 감당하기에는 힘든 일이었다.

소를 찾아 결국 '호랑이골'까지 들어갔다. 긴 막대기를 하나 들고 한 발씩 떼는 그 순간이었다. 나무 사이에서 무엇인가 스르륵 움직이는 소리가 났다. 나는 놀라 뒤로 자빠졌다. 숲 속에서 나뭇잎 움직이는 소리가 한층 요란해졌다. 도망가려 했지만 발이 얼어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잠시 후 소리의 장본인이 밝혀졌다. 내 인기척에 놀란 꿩이 푸드덕거리며 날아가는 소리였다. 나를 놀라게 한 것은 실제 호랑이가 아니라 '상상 속 호랑이'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 일을 겪은 뒤부터 호랑이골이 무섭지 않았다. 이후에도 소를 찾아 종종 호랑이골까지 들어갔지만 겁이 나지 않았다. 실제 호랑이를 보기 전까지 겁부터 먹을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호랑이골에서 겪은 일은 어려운 일이 닥칠 때마다 겁내지 않고 당당하게 맞설 수 있는 의지를 키우는 계기가 됐다. 직장 생활 40여년은 크고 작은 어려움의 연속이었다. 내가 몸담고 있는 회사는 7차례나 주인이 바뀌었다. 볼보건설기계코리아는 1998년 당시 외환 위기로 어려움을 겪던 삼성중공업 중장비 사업 부문을 글로벌 기업인 볼보가 인수·합병하면서 탄생했다. 나는 2009년 볼보그룹코리아의 첫 한국인 CEO(최고 경영자)가 됐다.

◇초등 2학년, '호랑이골'과 '월중고대'

역시 초등학교 2학년 때, 나는 '월중고대'라는 좌우명을 짓고 이를 신문지에 붓글씨로 써 책상 앞 벽에 붙여 놓았다. 월중고대의 '월'은 내가 다녔던 월항초등학교를 뜻하고 '중고대'는 중학교·고등학교·대학교까지 다니겠다는 나의 다짐을 의미했다.

나와 가족이 더 잘살려면 나도 공부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학교 졸업 후 부모님은 나의 고교 진학을 말렸다. 당시 형님이 서울에서 고시 공부를 하므로 가정 형편상 나는 집에서 농사를 짓는 게 낫겠다는 말씀이었다. 하지만 이는 내 좌우명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그래서 '서울의 명문 고등학교 시험에 응시해서 떨어지면 농사를 짓겠다'는 약속을 부모님과 했다. 시험을 치렀지만 불합격했다. 약속대로 집으로 내려와 농사를 지었지만 대학의 꿈을 포기할 수 없었다. 부모님을 졸라 그해 4월 고향의 농업고등학교에 입학했다.

나는 어릴 적부터 손재주가 좋다는 주변 사람들의 칭찬에 힘입어 공대 진학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농업 과목 시간에도 혼자 대학 진학 과목 공부를 자주 했다. 그 덕분에 원했던 대학에 들어갔지만 집에서 학비를 대줄 형편이 안 돼 5년 동안 입주 가정교사를 하며 학비와 생활비를 벌었다.

졸업 후 취직을 해서도 1년 더 가정교사를 했다. 가정교사 시절에는 학생의 부모님들로부터 많은 스트레스를 받아 학업을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종종 들었다. 하지만 내가 다짐했던 '월중고대'를 이루기 위해 참고 견뎠다.

회사가 스웨덴계 글로벌 기업인 볼보에 인수된 후에는 모든 중요 회의가 영어로 진행됐다. 공장장으로서 영어는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었다. 나이 48세에 중학교 영어책을 다시 집어 들고 공부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시중에 나와 있는 각종 영어 교재를 모두 모아 공부를 시작했다. 주말에도 회사에 나와 중학교 영어책을 무조건 통째로 반복해서 읽으면서 외웠다. 당시 대학생이던 아들과 단어 외우기 시합을 했다.

굳어진 머리였지만 반복하고 또 반복했더니 어느새 영어가 친해졌다. 이제는 하루 3~4차례씩 세계 각국과 각종 회의를 영어로 진행하는 데도, 창원 공장이 볼보그룹의 굴착기 생산 및 연구 개발의 핵심 거점으로서 다른 해외 공장들에 기술 전수를 하는 데도 언어 장벽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지금도 나는 어릴 적부터 확고한 비전을 가져야 인생을 살면서 부딪히는 많은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지혜와 용기가 생겨난다고 생각한다. 비전만 확실히 정립돼 있다면, 그 어떤 역경도 충분히 넘어설 수 있다.

[현장형 CEO 석위수 사장은]

석위수(石衛洙·64) 볼보그룹코리아 사장은 40년 가까이 건설 중장비 분야에서 잔뼈가 굵은 현장형 CEO(최고경영자)다. 석 사장은 1998년 삼성중공업 건설기계 부문을 인수하면서 한국에 진출한 볼보그룹이 임명한 첫 한국인 사장이다.

볼보그룹 내에서 그의 별명은 '제너럴 석(석 장군)'이다. 치밀하게 전략을 세우고, 한번 세운 목표는 반드시 달성하는 그의 추진력 때문에 붙었다. 석 사장은 '창원식 경영 시스템'을 볼보그룹 전체로 확산시켰다. 그는 한 생산 라인에서 여러 모델을 동시에 제작하는 방식을 도입해 그만큼 생산 기간을 줄이고, 또 팔리는 만큼만 만들어 재고가 쌓이지 않도록 했다. 그가 창원 공장에 붙인 '재고(在庫)는 죄고(罪庫)다'라는 표어는 '재고는 재난(災難)이다'(중국 공장), '재고는 종말의 시작'(독일 공장) 등으로 번역돼 전 세계 볼보그룹 건설기계 공장에 붙어 있다. 토종 한국인으로 글로벌 기업에서 성공한 비결에 대해 그는 체력과 전문성, 외국어 능력 등 세 가지를 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