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 절반이 사진… 보관한 필름만 50만 컷

사진전을 연다는 가수 한대수(66)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왕이면 사진 작업하는 모습을 볼 수 있게 작업실에서 인터뷰하고 싶다고 했더니 한대수는 "신촌 △△영화관 옆 카페 ○○에서 보자"고 했다. "작업실은요?" "그러니까 커피숍에서 보자고요."

며칠 뒤 약속 장소로 가서야 엇박자 같던 대화가 진짜였음을 알게 됐다. 대로가 훤히 내다보이는 서울 신촌의 한 커피숍 2층 창가에서 돋보기를 낀 채 사진 수정 작업을 하고 있는 한대수를 발견했다. "고시원 같은 비좁은 집에 살아요. 옥사나(44·부인), 양호(7·딸)하고 누우면 발 돌릴 틈도 없답니다." 커피숍 위 오피스텔 건물에 사는 한대수는 전시 준비를 위해 한 달간 거의 매일 커피숍으로 출근하고 있었다.

이렇게 척박한 환경에서 준비한 한대수의 사진 작품이 7~20일 서울 인사동 리서울 갤러리에서 열리는 '꿈꾸는 삼총사'전에 걸린다. 마광수(63) 연세대 교수, 변우식(43) 팝아티스트와 함께 여는 삼인전이다. 한대수가 사진전을 여는 건 지난 2000년 '작은 평화' 전 이후 14년 만이다. 터키, 이탈리아 등지를 여행하며 찍은 사진 17점을 전시한다. 아내의 누드 사진도 포함됐다. "주제가 'Slice of Life(인생의 한 조각)'예요. 고독과 고통이 뒤섞인 우리 삶의 단면을 보여주는 장면을 골랐습니다."

그 순간 아내 옥사나가 불쑥 커피숍으로 들어와 옆 사람은 안중에도 없는 듯 남편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Give me money(돈 좀 줘)." 한대수는 그런 아내에게 초탈한 표정으로 만원짜리 한 장을 꺼내줬다. "인생이 이렇게 고통 덩어리예요. 이게 사진으로 말하고 싶은 우리네 인생살이랍니다." 러시아계 이민자로 뉴욕에서 만나 결혼한 한대수의 부인 옥사나는 심한 알코올의존증을 앓고 있다.

'사진가' 한대수. '한국 포크록의 대부'라는 수식에 익숙한 대중에겐 낯선 타이틀이지만, 사실 한대수의 인생 절반은 사진으로 채워져 있다. 1960년대 "부산에 있는 목장을 주겠다"는 할아버지(한영교 박사)의 뜻에 따라 미국 뉴햄프셔대 수의학과에 진학했지만 학업엔 뜻이 없었다. 어느 날 'Popular Photography'라는 사진 잡지를 들춰보다가 사진에 매료돼 뉴욕 인스티튜트 오브 포토그래피에 진학한다. 사진 공부를 하겠다고 하자 집안에선 학비 지원을 끊었고, 접시 닦기를 해 학비를 벌며 고달픈 뉴요커의 생활을 이어갔다. 한대수는 "그 시절 '세런디피티 3'라는 레스토랑에서 일했는데 존 레논, 오노 요코, 재클린 오나시스 같은 유명인들이 많이 와서 몰래몰래 사진을 찍었다. 지금 우리 집에 잠자는 필름 속에 그들도 잠자고 있다"며 웃었다. 1990년대엔 건축 사진 거장 너새니얼 리버먼(Nathaniel Lieberman)의 스튜디오에서 일하기도 했다. 리버먼이 펴낸 유명 건축사진집 '맨해튼 라이트스케이프(Manhattan Lightscape)'의 스태프 명단엔 그의 영문명 'Daesoo Hahn'이 선명히 찍혀 있다.

한대수는 "내게 음악은 '살아온 일기'이고, 사진은 이따금 내다보는 '삶의 창문'이다"라고 비유했다. 신기하게도 평생 기타와 카메라를 곁에 뒀지만, 둘을 함께 가지고 다닌 적은 없다. 그래서 자신의 카메라로 자신의 공연을 찍은 사진은 한 장도 없다고 한다. 지금까지 찍은 50여만 컷의 필름을 보관하고 있다는 한대수는 "반전 운동과 히피 문화가 만개했던 1960년대의 뉴욕, 1970년대 유신 체제 아래 평화와 자유를 갈구했던 한국을 찍은 사진은 죽기 전에 꼭 정리하고 싶다"고 했다.

인터뷰가 끝날 때쯤 옥사나가 초등학교 1학년 딸 양호를 데리고 커피숍을 다시 찾았다. '아빠' 한대수가 작업하는 사진 속엔 젊은 날 누드 차림의 엄마 옥사나가 있었다. 자유 영혼으로 길러진 아이는 아무렇지 않게 엄마의 누드 사진을 바라봤다.